FBI는 왜 찰리 채플린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나
[이준목 기자]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 tvN |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영국이 낳고 미국이 사랑한 세계적인 배우이자 코미디언, 영화 감독인 찰리 채플린(1889-1977)이 남긴 격언이다. 20세기가 배출한 가장 뛰어난 코미디의 거장으로 불린 채플린의 인생은, 그의 작품세계만큼이나 파란만장한 블랙코미디이기도 했다.
5월 9일 방송된 tvN 역사강연 <벌거벗은 세계사> 98회는 '미국은 왜 슈퍼스타 찰리 채플린을 버렸나' 편을 통하여 채플린의 영화보다 영화같았던 인생과 작품세계를 조명했다. 미국사 전문가인 김봉중 전남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채플린은 세기의 배우이기도 하지만, 미국사와 세계사의 격동기에 '영화로 시대를 기록한 거장'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시대상이나 역사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유독 많았다. 산업화, 전체주의, 독재, 반전 등 그 시대의 이슈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유쾌한 웃음 뒤 가려진 날카로운 조롱과 풍자로 조명하며 이름을 떨쳤기에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역사적 자료로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채플린은 1889년 4월 16일 영국 런던의 빈민가인 월워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찰스 채플린과 어머니 해나 채플린은 모두 무대 공연을 하던 가수와 배우 출신으로, 채플린은 부모님의 아티스트로서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부친은 알콜 중독으로 요절했고, 모친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채플린은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그에게 찾아온 기회
채플린의 인생 첫 데뷔 무대는 5세 때였다. 목이 상하여 공연을 망치고 관객들의 야유를 받던 어머니를 대신하여 우연히 무대에 오른 채플린은 어머니의 쉰 목소리를 흉내내어 노래를 불렀고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후 채플린은 아버지 찰스의 주선으로 아동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하기도 했으나, 부친의 사망으로 인하여 생활고에 휩쓸리며 극단을 퇴단하고 어린 나이에 온갖 험한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야했다.
그럼에도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플린은 14세에 다시 한 극단에 입단했다. 연극 <셜록홈즈>에서는 꼬마 심부름꾼인 빌리 역할을 맡아 열연하며 호평을 받았다. 차근차근 경험을 쌓은 채플린은 1908년 만 19세 때 영국 최고의 인기 희극 극단이던 카노 극단에 입단하며 연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채플린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프레드 카노의 눈에 들어 불과 10대의 나이에 분장을 하고 '주정뱅이'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2년 뒤에는 카노 극단의 미국 전국 순회공연에서 메인 주연배우로 당당히 등극하며 명성을 쌓았다.
미국 공연 당시 채플린의 연기를 눈여겨본 미국의 영화제작자 겸 코미디 배우 맥 세넷(1880-1960)은 1913년 채플린에게 전속 계약을 제안했다. 채플린은 제안을 수락했고 극단을 나와 세계영화산업의 메카 할리우드로 진출한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이때를 계기로 채플린은 영국인임에도 미국 활동에 더 주력하게 된다.
할리우드는 본래 농촌지역이었으나 20세기 들어 LA에 합병되고 워너브러더스-유니버설사 등 유명 영화사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며 영화산업이 서서히 붐을 탔다. 채플린은 영화계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자신만의 '독창적 캐릭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고심 끝에 만들어낸 것이 콧수염과 타이트한 상의, 헐렁한 바지와 큰 신발, 중절모와 지팡이까지, 훗날 찰리 채플린의 상징이자 인생캐릭터가 된 '떠돌이(The Tramp)'의 탄생이었다.
떠돌이는 당시 사회의 가난한 이민자, 노동자 등 소외된 계층, 즉 미국 자본주의의 그늘에 속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캐릭터였다. 1914년 개봉한 <베니스에서의 어린이 자동차 경주>는 떠돌이 캐릭터가 세상에 최초로 선을 보인 작품이다.
채플린은 떠돌이 캐릭터에 대하여 "내가 스크린 위에 선보이는 가엾은 존재, 그 겁많고 허약한 친구는 결코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는다. 희망, 꿈, 갈망이 덧없이 사그라지고 나면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 발길을 돌릴 뿐이다. 이토록 비극적인 모습의 인물이 다른 어떤 인물보다 많은 웃음을 자아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하며 "이것은 웃음이 눈물과, 혹은 눈물이 웃음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면서 자신만의 철학을 드러낸바 있다.
채플린은 데뷔 첫해인 1914년에만 무려 34편에 이르는 영화에 출연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또한 배우로서만 만족하지 않고 데뷔작 <사랑의 20분>를 연출하며 감독으로까지 영역을 넓혔다. 채플린은 비싼 필름값과 제작비 때문에 당시만 해도 제작사나 배우들 모두 꺼려하던 '재촬영'도 마다하지 않으며 영화의 퀄리티를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뚝심을 드러낸 일화로 유명하다.
배우와 감독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며 채플린의 주가는 점점 치솟았다. 할리우드 입성 3년 만인 1917년에는 100만 달러(현재 가치 2350만 달러, 한화 305억 5000만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몸값을 받는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채플린이 한창 승승장구할 무렵,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당시 채플린은 1차대전의 참호전을 소재로 하여 직접 주연과 감독을 맡은 <어깨총>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당시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전쟁을 소재로 하거나, 전쟁을 희화화하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다. 하지만 <어깨총>은 코미디 영화의 외피 속에 반전에 대한 강렬한 메시지를 담아내며 오히려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1차대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어깨총>에 더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공감했다고 한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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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는 이른바 '흥청망청의 시대'로 불리우던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대호황기였고, 채플린의 영화인생도 이 시기에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했다. 채플린은 1919년 30세의 나이에 동료 영화인들과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를 설립하며 배우와 감독을 넘어 제작자의 길에 뛰어들었다.
1921년 채플린 최초의 장편영화 <키드>는 본인의 어린 시절을 담아낸 자전적 스토리였다. 채플린은 산업화로 인한 빈부격차를 담아낸 메시지로 웃음과 감동을 모두 잡아내며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1921년 9월, 어엿하게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슈퍼스타가 되어 10년 만에 고향 영국으로 채플린이 금의환향하자, 당시 엄청난 인파가 운집하여 그의 엄청난 인기와 위상을 실감케했다.
1927년 <재즈싱어>를 시작으로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시대적 변화를 맞이하며 영화산업은 또다른 격변기에 접어들었다. 채플린은 유성영화의 제작 방식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1930년대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은 미국 전역에 실업자가 속출하고 8000여 개가 넘는 영화관이 문을 닫으며 영화산업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급변하는 시대적 격랑 속에서도 채플린은 꿋꿋하게 자신의 소신과 방식대로 영화 제작을 멈추지 않았다. 무성영화 방식을 고수한 1931년 <시티라이트>는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떠돌이와 눈먼 소녀의 사랑을 통하여 하층 빈민들의 희망을 노래했다. <시티라이트>는 대공황에 지친 미국인들에게 희망의 빛을 선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또다시 큰 성공을 거뒀다.
1936년에는 채플린의 또다른 대표작인 <모던 타임즈>가 탄생했다. 자동화된 기계속에 죽어가는 인간성과 산업사회가 가져다준 인간소외 문제를 풍자적 시선으로 다룬 <모던 타임즈>는 영화사상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채플린은 1931년 영국에서 인도의 정치가이자 철학가 마하트마 간디를 만나 '기계 문명의 폐해'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서 <모던 타임즈>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작품은 할리우드 최후의 무성영화이자 채플린의 상징인 떠돌이 캐릭터가 등장한 마지막 작품으로도 남아있다.
1940년,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인 51세의 채플린은 자신의 최초 유성영화인 <위대한 독재자>를 선보인다. 영화 속에서 채플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첫 작품이기도 한 <위대한 독재자>에서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빗댄 독재자 '힌켈', 그와 닮은 유대인 이발사 찰리의 1인 2역을 연기했다.
영화 기획 당시는 2차대전이 아직 발발하기 전으로 나치 독일이 서슬퍼렇게 건재하던 시기였고, 서방진영은 나치보다도 소련의 공산주의를 더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 언론은 히틀러를 대놓고 조롱하고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채플린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채플린은 "나는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후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협박, 검열, 그밖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의연하게 대처하며 "영화로 전 세계에 실로 건강한 웃음이 퍼지기를 기대한다"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영화 제작기간 중 2차대전이 발발했고, 히틀러에 대한 영화 줄거리와 채플린의 선견지명은 재평가를 받는 전화위복이 됐다. 채플린은 더욱 제작에 박차를 가하며 끝내 작품을 완성해냈다. <위대한 독재자>는 제작기간 559일, 촬영기간 168일, 총예산 140만 3500달러(한화 382억 5000만 원)라는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 당시로서는 엄청난 초대작이었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며 채플린의 최고 흥행작이자 시대를 앞서간 정치풍자극의 걸작으로 남았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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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어떤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천재 예술인의 화려하던 영화 인생에도 한편으로 전례없는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전 세계에는 이른바 '냉전'의 시대가 도래했다. 미국 사회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과 공포감이 높아졌고, 이는 반공주의와 '매카시즘'의 광풍으로 이어졌다. 정치권에 이어 예술계까지 뻗친 매카시즘의 표적이 된 것은, 영화 속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담아온 채플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극단적 반공주의자들은 채플린의 작품 <살인광시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았다는 이유로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한둘을 죽이면 악당이고, 대량학살을 하면 영웅이 된다"는 극 중 대사를 두고 2차대전에서 싸운 연합군 장병들을 모독했다는 논란이 벌어졌고, 검열 당국은 채플린의 작품이 반애국주의-공산주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비난했다. <살인광시대>는 많은 지역에서 상영금지조치를 받으며 결국 흥행에 실패했다. 채플린이 2차대전 당시 1942년 소련 대사를 대신하여 연설을 하며 친소련적인 주장을 했던 전력이 발굴된 것도 그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채플린을 감시하며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데 앞장섰던 것이 놀랍게도 미국의 주요 정보기관인 FBI(미 연방수사국)이었다. 당시 국장 에드거 후버는 공산주의자 색출을 명분으로 채플린에게도 사찰과 도감청 등 여러 가지 불법적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채플린의 모국인 영국 정보기관 M15조차 채플린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려는 FBI의 정보조회에 대하여 "그는 그저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전했지만, FBI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음모를 꾸몄다. 이번엔 채플린의 사생활과 여성편력을 파헤치며 공격했다. 실제로 채플린은 평생 네 번의 결혼을 했고 모두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여성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심지어 세 번째 부인 폴렛 고다드(당시 26세)를 제외하면 밀드레드 해리스, 리타 그레이, 우나 오닐은 모두 결혼 당시 10대 미성년자였다.
이런 채플린의 이해할 수 없는 여성 편력에는 이루어지지 못했던 그의 '첫사랑' 헤티 켈리의 영향 때문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채플린이 영국 카노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시절, 무용수로 처음 만났던 켈리의 나이는 당시 15세였다. 채플린은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후, 켈리와의 재회를 고대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당시 유럽을 강타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채플린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요절했다. 채플린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켈리를 그리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채플린은 세 번의 이혼을 거쳐 54세의 나이에 18세였던 우나 오닐과 네 번째 결혼을 했고, 8명의 자녀를 낳으며 채플린의 사망까지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또한 채플린은 한때 잠시 교제했던 조앤 배리가 채플린의 딸을 낳았다고 주장하며 벌인 친자 소송에서 패배하며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의 양육비를 지급해야 했다. 사실 조앤의 딸은 채플린의 친자가 아니라는 것이 나중에야 밝혀졌지만, 그 배후에는 채플린의 여성편력을 부각시켜 평판을 악화시키려는 FBI의 음모가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
또한 채플린이 미국에서 오래 활동했음에도 끝내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은 것도 의혹에 휩싸였다. 채플린은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이 세계시민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국적을 바꿔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거듭된 사생활 논란과 여론의 공격 속에 채플린은 어느덧 최고의 스타에서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해있었다.
채플린은 비난 속에서도 영화작업을 계속했지만 1952년 <라임라이트> 개봉을 맞이하여 고국인 영국 런던을 잠시 방문한 틈을 타 미국 법무부는 채플린의 미국 입국 비자를 전격 말소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법무부는 채플린의 도덕성과 공산주의 의혹을 비자말소의 명분으로 제시했다. 그렇게 채플린은 63세의 나이에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다 준 기회의 땅이었던 미국에서 추방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채플린은 이후 스위스에 정착하며 영화제작과 시나리오 작업을 이어갔지만 1970년대에 접어들며 건강 악화로 더 이상 공식 활동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 그렇게 한동안 쓸쓸히 잊혀진 듯했던 채플린은 1972년 44회 미국 아카데미가 수여하는 평생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무려 20년 만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된 채플린이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자 약 12분에 걸쳐 뜨거운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감격에 겨운 채플린이 눈물을 흘리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했다.
아카데미는 채플린의 페르소나인 떠돌이 캐릭터를 상징하는 중절모와 지팡이를 선물했고, 채플린은 즉석에서 녹슬지않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이며 관객을 웃음짓게 했다. 1952년에 제작된 <라임라이트>도 제작한지 약 20년만에 미국에 소개되어 다시 빛을 볼수 있었다.
명예회복을 이룬 채플린은 이후 조용한 삶을 보냈고, 말년에 뇌졸중을 앓다가 1977년 노환으로 타계했다. 채플린은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100인, 영국 KBE 기사 서훈, 스미소니언(미 국립교육재단) 선정 '미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대중문화 아이콘' 등에 선정되며 명실상부하게 20세기를 빛낸 최고의 문화예술인으로 미국-영국에서 모두 재평가를 받았다.
채플린은 생전에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계기가 되는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내가 웃는 일을 절대로 없을 것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채플린의 영화와 인생, 웃음에 대한 철학을 가장 잘 요약하는 표현일 것이다. 영화인생의 정점에서 불합리한 정치적 스캔들에 휘말리며 억울한 피해를 당한 시절이 길었지만, 채플린은 그럼에도 영화사에 한 획을 그으며 미국의 현대사를 영화에 투영해냄으로서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는 위대한 예술가로 영원히 남을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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