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안창호 옆에..." 해방 조국서 자결 결심한 독립투사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 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기자말>
[김경준 기자]
해방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과도정부 수립'을 당면 과제로 천명했다. 1945년 9월 3일 임시정부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의 명의로 발표한 '당면정책'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전국적 보통선거에 의한 정식 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 국내외 각 단체와 협의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할 것을 1차 목표로 상정하고 있었다. 과도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는 국내질서 및 대외관계 일체를 임시정부가 부책(負責) 유지한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의 좌절
그러나 한반도의 상황은 임시정부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미군정의 강요에 따라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부터 이미 불안한 조짐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임시정부가 환국한 직후인 1945년 12월 말에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미·영·중·소 4개국의 신탁통치가 결정됐다. 어렵게 되찾은 한반도의 주권을 다시 외세에 빼앗길 수 없었던 임시정부는 즉각 반탁운동에 돌입했다.
▲ 1946년 신탁통치 반대시위 당시 임시정부 청사이자 김구의 숙소였던 경교장에 몰린 군중들의 모습 (LIFE Alfred, Elsenstaedt 촬영) |
ⓒ 서울시 |
▲ 1947년 2월 국민의회 조직개편 소식을 보도한 1947년 2월 27일자 <조선일보> 기사. 문일민은 노농위원(勞農委員)으로 보선됐다. |
ⓒ 조선일보 |
이 무렵 문일민은 한국독립당으로 당적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충칭 시절 한독당 독재체제를 반대하며 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신한민주당 등 줄곧 야당 세력으로 활동하던 문일민이 왜 갑자기 한독당으로 당적을 옮겼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추정컨대 해방 정국에서 정부 수립 문제를 놓고 김구와 한독당 노선에 공명하여 그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문일민이 속해있던 신한민주당은 1946년 9월 15일 재미한족연합회·청우당·조선혁명당·신한민족당·국민당·삼우구락부 등과 연합하여 신진당(新進黨)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이들은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당시 참가를 결정했다.
그러나 김구를 비롯한 한독당 세력은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할 정도로 미소공위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훗날 문일민은 김구의 반탁운동 및 자주적인 통일정부 수립 노선에 절대적 지지를 선언했던 만큼, 아마 이 무렵 신민당을 탈당하고 한독당에 입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탁통치 철폐를 '제2의 독립운동'으로 간주한 국민의회는 자주적인 과도정권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3월 임시정부를 확대·강화하는 형태로 과도정권 수립을 선포했으나 미군정의 제지로 좌절됐다.
국민의회는 9월 초 제43차 임시회의를 열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남한만의 총선거에 반대하는 입장을 채택하고 조직을 쇄신했다. 그러나 남한총선거에 찬성하면서 이승만 지지를 선언한 지청천과 국민의회의 독단적인 인사에 불만을 품은 이시영이 잇따라 국무위원직을 사퇴하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친일파 활개치는 현실에 자결 결심
정세는 남북분단을 향해 치닫는 가운데 독립운동가들조차 정부 수립 방향을 놓고 분열하는 상황에 문일민은 답답함을 느꼈다.
▲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기로 유명했던 악질친일경찰 노덕술. 해방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되어 좌익 계열 인사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의열단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했던 약산 김원봉 역시 그에게 뺨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고 전해진다. |
ⓒ 민족문제연구소 |
'애국자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나라는 위기가 잠복하는 법이다. 이를 보고 누군들 비분강개치 아니하랴. 비록 미련하고 우둔하지만 이 한 목숨을 홍모(鴻毛)로 생각한지는 오래다. 내 감히 충정공 민영환과 같이 자결함으로써 애국동포의 정신을 일깨우리라.'
문일민은 을사늑약 당시 자결로써 절의를 지키고 대한제국 백성들의 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민영환과 같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이 뒤틀린 현실을 고발하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굳힌 문일민은 비장한 각오로 여러 통의 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회정세를 지적하고 정치지도자들의 각성을 요청하는 장문의 유서와 김구·김규식·유동열 등 민족지도자 3인에게 보내는 유서, 부인 앞으로 남긴 유서, 국민의회 앞으로 보내는 유서 등이었다.
'팔판동 우거인(寓居人) 문일민'이라는 이름으로 김구·김규식 앞으로 보낸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김구 앞으로 보낸 유서]
"우리는 주석(김구-인용자 주)을 모시고 풍찬노숙에도 동고동락하면서 오로지 조국의 광복만을 일념삼아 이역에서 항일투쟁을 일삼았고 쓰라림을 견디어 왔습니다.
이 한 몸은 한쪽 다리를 잃기도 했지만 일신(一身)은 이미 조국에 바친 몸, 오히려 이를 영광으로 여기면서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해방된 조국땅에 금의환향의 심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미·소 양군이 점령하는 바 돼버렸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는데 국토양단의 슬픔도 모자라 좌우로 쟁투를 벌이더니 대한민국의 법통을 이어온 임시정부마저 부정을 당한 마당에, 주석과 우남(이승만-인용자 주) 양 영수의 의견까지 불일치하니 불초(不肖)는 혁명가로서의 이 한 몸을 제단에 바쳐 양 영수의 각성을 진작 호소코자 단심(丹心)을 뿌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바라건대 주석께서는 그 넓은 도량으로 우남을 설복하고 일신동체로 합력하여 기어이 통일독립 달성의 초지(初志)를 관철하소서…."
[김규식 앞으로 보낸 유서]
"우사(김규식-인용자 주)께서는 김구 주석과 함께 내외에 걸쳐 조국광복의 선구적 지도력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광복된 조국은 외군(外軍)이 들어와 우리 겨레를 지배하고, 한편으로 우남은 자고로 내분의 제1인자이더니 이제 와서는 자기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던 임정의 법통마저 무시하고 단정 수립의 아집과 권세욕으로 민족 분열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우사께서는 그 밝은 통찰의 형안과 학덕의 높은 견식으로써 김구 주석과 노선을 함께 하시어 겨레와 조국의 통일독립을 이룩하여 주소서…."
한편 부인 안혜순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지아비로서 고생만 시켜 미안하며 이 몸은 벌써 나라 앞에 바친 터임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인즉 너무 슬퍼하지 말고, 다만 철부지 식솔을 가냘픈 당신에게 맡기고 떠남이 백번 천번 죄스러우나, 당신은 사람의 뜻을 능히 감내해줄 것으로 믿으면서 굳이 장부(丈夫)의 마지막 길을 택함을 허물하지 말기 바라며 나를 안창호 선생 무덤 옆에 묻어주시오."
▲ 1947년 10월 26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문일민의 사진 |
ⓒ 조선일보 |
마침내 거사일로 정한 1947년 10월 25일이 밝았다. 문일민은 천천히 거사장소인 중앙청(미군정 청사)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 22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한성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민중일보>, <경향신문>, <독립신보>, <대구시보>, <대동신문>
조덕송, <民族 大드라마의 証言>(2), 《주간조선》, 1988.1.17
오대록, <해방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5
오대록, <해방 이후 大韓民國 國民議會(1947~1948)의 활동과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4,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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