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무글꺼 있나"…6·25 겪은 칠곡 할매들, 우크라에 위로 편지
“아이고 그래 전장(전쟁) 났다미. 그 어려운 데서 애들하고 우예(어떻게) 사노. 머 무글 꺼(먹을 것)는 있나. 보태주마 좋을 껀데 마음뿐이다.”
일흔을 넘어 한글을 깨친 조임선(86) 할머니가 공책에 꾹꾹 눌러 쓴 글이다. 삐뚤빼뚤한 글씨체 때문에 내용이 쉽게 눈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 사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할매들의 따뜻한 위로…“꿈만은 불타지 않길”
6·25 한국전쟁을 겪은 ‘칠곡할매’들이 전하는 손편지가 칠곡할매글꼴을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전달된다. 어린 시절 먹고 사는 일에 쫓겨 한글을 배우지 못하고 지금에서야 한글을 깨친 경북 칠곡군 할머니 50여 명의 반전(反戰) 메시지다.
10일 칠곡군 등에 따르면 칠곡 할머니들은 최근 마을 경로당에 모여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해 연필을 잡고 꾹꾹 눌러 글을 작성했다. 전쟁으로 두려움에 떨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응원 메시지를 담았다. 잿더미 속에서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 이야기를 통해 희망도 전했다.
칠곡 할머니들은 나이와 경제적 상황으로 우크라이나를 돕지 못하고, 6·25 당시 대한민국이 받았던 도움만큼 베풀지 못하는 현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편지에는 “수많은 미군과 외국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그들이 보내준 구호 물품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가 도움을 받은 만큼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박점순·84) “전쟁으로 살고 있던 집이 불타 밤새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꿈만은 불타지 않길 바란다”(장말병·92) 등 내용이 담겼다.
또 양화자(87) 할머니는 “마을은 전쟁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불발탄과 지뢰였다”며 “할 수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대한민국처럼 잘 살 수 있다”며 희망을 전했다.
할매 손편지 주한 우크라 대사관 전달 예정
할머니 손편지는 대통령실 공식 문서에도 사용된 적 있는 ‘칠곡할매글꼴’을 통해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전달될 예정이다. 한글로 적힌 손편지 내용은 칠곡할매글꼴 영문 글씨체로도 번역돼 책자로도 만든다.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 관계자는 “전쟁의 아픔을 잘 알고 있는 할머니들로부터 큰 위로와 용기를 얻을 것 같다”며 “책자는 본국으로 보내 국민과 함께 희망을 공유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칠곡할매글꼴은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한글을 배운 이종희(91)·추유을(89)·이원순(86)·권안자(79)·김영분(77) 할머니 등 칠곡 할머니 다섯 명이 넉 달 동안 종이 2000여 장에 연습한 끝에 제작한 글씨체(5종)로 2020년 12월 한글과 영문으로 출시됐다.
영어를 배운 적이 없는 할머니들은 가족과 성인 문해 강사 도움을 받아 그림 그리듯 알파벳을 그려가며 칠곡할매글꼴 영문 글씨체도 완성했다. 칠곡할매글꼴은 윤석열 대통령 신년 연하장에 사용되고 국립 한글박물관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김재욱 칠곡군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MS오피스 프로그램에도 칠곡할매글꼴이 포함돼 있다”며 “진심 어린 할머니 마음을 통해 칠곡할매글꼴을 세계에 알리는 것은 물론 하루빨리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칠곡=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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