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대일외교 폭주... 시간 없다, 대법원 빨리 결정하라 [소셜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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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10대의 나이에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강제동원된 청년 이춘식은 일본제철 가마이시(釜石) 제철소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중에 징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고베(神戸)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끌려간 모든 조선의 청년들이 해방을 맞아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강제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 가마이시 제철소 노무과에 찾아가 월급을 요구했으나 받지 못하고 귀국했다.
고베에서 가마이시까지 1천㎞가 넘는 머나먼 길, 전쟁의 폐허로 교통수단도 마땅치 않은 그 길에서 청년 이춘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식민지 조선의 청년 이춘식에게 그 길은 짓밟힌 자신의 인권과 존엄을 다시 찾기 위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고 73년이 지난 2018년 10월 30일, 대한민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가해 기업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들의 역사적인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법정에서 판결을 직접 들은 이춘식 할아버지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첫 질문에 "기쁨이 아니라 눈물이 나오고,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할아버지는 가장 먼저 1997년 일본에서 처음 소송을 제기한 여운택, 신천수씨 그리고 2005년 한국에서 자신과 함께 소송에 합류한 김규수씨를 떠올렸다.
"그 사람들하고 같이 있었으면 엄청 기쁠 텐데 나 혼자 나와서 눈물이 나오네."
할아버지는 함께 소송투쟁을 시작했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을 그리워하며 승소의 기쁨에 앞서는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기나긴 투쟁으로 쟁취한 대법원 판결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가 불법이며,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강제동원·강제노동이 반인도적 불법행위라는 점을 명확히했다.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벌인 식민지 지배가 반드시 청산해야 하는 역사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세계사적인 판결이다. 또한, 국가 중심의 국제법에서 개인의 인권 중심의 국제법으로 발전해 온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의 성과를 반영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협정 당시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정치적 타협으로 '한일 청구권 협정'을 체결했다. 피해자들은 국가가 무시한 자신의 인권 회복을 위해 일본과 한국의 법정에서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싸워왔다. 일본 사법부는 강제동원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재판을 통해서는 권리구제를 받을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결론만을 되풀이했다.
부당한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피해자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의 법정에서 다시 소송투쟁을 이어갔다. 포기하지 않은 피해자들은 마침내 2018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65년 체제'를 극복한 것이다.
나아가 이 판결은 1987년 민주화와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공개 증언 이후 199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소송투쟁의 성과가 맺은 결실이다. 그런 점에서 대법원 판결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끈질기게 추궁해온 한국과 재일동포, 일본 시민들이 피해자들과 함께 벌여온 한일 시민연대가 이뤄낸 역사적 승리이다.
그해 11월 28일 일본제철 소송에 이어 미쓰비시중공업에 근로정신대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했던 양금덕, 김성주 할머니 등이 제기한 소송에서도 피해자들이 최종 승소했다. 또한,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정주 할머니 등이 후지코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도 피해자들의 승소 판결이 잇따랐다.
▲ 윤석열 대통령과 1박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한일 정상 확대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한국 대법원에서 판결이 최종 확정되자 피해자들은 비로소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통한 권리회복의 길이 활짝 열릴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판결 직후부터 한국 최고 법원의 판결에 대해 "국제법 위반"이라는 단 한 마디만을 무한 반복하며 한국의 사법 주권을 공공연히 무시했다.
2019년 아베 신조 총리는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로 한일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등 가해 기업은 일본 정부 뒤에 숨어서 피해자 측과 일체의 대화마저 거부했다. 판결 이후 피해자 측이 세 차례 가해 기업을 찾아갔지만 그들은 문전박대로 일관했고 심지어 우익세력이 몰려와 우리 일행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일본제철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소송을 시작한 것이 1997년이니 2018년 판결이 확정되기까지 21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가해 기업들은 일본 정부 뒤에 숨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비상식적이고 반인권적인 행태를 되풀이하여 피해자들의 인권을 짓밟았다. 이렇게 가해 기업이 판결 이행을 위한 대화에 전혀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권리 행사를 위해 현금화 절차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강제집행은 일반적으로 압류와 현금화(매각)로 진행된다.
일본 정부는 현금화 절차가 진행되자 서류를 피고 기업에 전달도 하지 않고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되돌려 보내는 식으로 절차를 지연시켰다. 가해 기업들은 공시송달이 진행되자 대리인을 선임하여 절차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전략을 썼다. 일본 정부는 현금화가 집행되면 "한일 관계가 파탄이 날 것"이라며 협박마저 서슴지 않았다.
이른바 '현금화는 한일관계 파탄을 뜻한다'는 주장이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양국 시민사회에서도 나오는데, 그 의미를 모르겠다. 대체 '파탄'이란 뭘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같은 상태인가? 가해 기업의 한국 내 자산 현금화가 이뤄지면, 자위대가 독도에 상륙하거나 서울에 미사일 공격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거꾸로 주일 한국 대사가 일본 총리를 면담할 수 없는 현 상황은 우방국 간의 통상적인 관계로 볼 때 이미 파탄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파탄' 운운하는 주장은 '여기서 더 나아가면 큰일난다'며 피해자를 위협하고, '이제 적당히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것일 뿐이다.
사법 농단 망각한 한국 정부와 사법부
2018년 대법원 판결은 파기환송심 판결로부터 5년이나 걸렸다.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와 외교부, 양승태 사법부, 가해 기업의 대리인 김앤장까지 가담한 불법적인 사법 농단으로 지연된 것이다. 사법 농단이 자행되는 동안 일본제철 소송의 피해자 원고 네 분 가운데 세 분이 돌아가셨다.
지난해 7월 26일 윤석열 정부의 외교부는 대법원에 현금화를 사실상 미뤄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외교부가 피해자들의 의견을 듣는다며 민관협의회를 두 차례 진행한 뒤의 일이다. 박근혜 정권 당시 외교부는 사법 농단 과정에서 편법으로 만든 민사소송규칙을 활용하여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고 선고를 지연시켰다. 사법 농단에 가담했던 외교부가 아무런 반성도 없이 다시 그 규칙을 활용하여 피해자들의 권리실현을 가로막은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고 되풀이했지만 실제로는 피해자들의 채권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찾는 일에만 몰두했다. 피해자들이 평생을 걸고 싸워 온 인간 존엄의 회복을 위한 투쟁의 역사, 그들이 쟁취한 대법원 판결이 갖는 세계사적인 의미가 한국 정부의 안중에는 없었다. 피해자들이 왜 그토록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지 귀기울이기보다는 '돈'으로 이 문제를 봉합하려는 데에만 모든 힘을 쏟았다.
외교부 의견서 때문인지 대법원은 특별한 이유 없이 현금화 결정을 미루고 있다. 또한, 대법원은 2018년 이후 대법원에 계류된 강제동원 소송에 대해 그 어떤 판결도 내리지 않고 있다. 한일관계 악화를 의식한 대법원이 확정판결을 미루고 있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와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강제동원 소송 대리인단 등 관계자들이 4월 1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을 규탄하며 대법원 특별현금화 명령 재항고심 사건에 대한 신속한 판결을 촉구하고 있다. |
ⓒ 유성호 |
지난 1월 12일 외교부와 정진석 의원(한일의원연맹 회장)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국장은 이른바 한국 정부의 '해법안'을 발표했다. 대법원이 선고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한국 측이 대신 떠맡아 일본 정부와 가해 기업의 책임을 완벽하게 면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공개토론회는 인쇄물 한 장도 없이 8명의 토론자에게 각각 5분의 시간이 주어졌을 뿐 토론이나 질의응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가 주최한 행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졸속으로 치러진 요식행위였다. 그런데도 정부는 공개토론회가 피해자 의견 수렴을 위한 마지막 절차라며 피해자에게 직접 정부 해법을 설명하고 설득하겠다고 나섰다.
돈으로 봉합하려다 실패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교훈을 까맣게 잊은 듯 다시 '돈'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정부가 배상이 아닌 '기부금'을 피해자들에게 들이밀며 부당한 선택을 강요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다시 벌어졌다. 정부는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의 성격을 지우기 위해 굳이 '판결금'이라는 말을 쓰고, 일본의 선의에 기댄 '기여'와 '성의 있는 호응'이라는 표현을 고집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이러한 행태는 수십 년 투쟁 끝에 비로소 승리한 피해자들을 일본 정부와 가해 기업에 선의를 '구걸'하는 사람들로 전락시켜 다시금 모욕한 것이다.
3월 6일 정부는 대법원에서 승소한 피해자들에게 기부금을 모아 배상금에 해당하는 돈을 지급한다는 이른바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다. 양금덕, 이춘식, 김성주 세 분의 생존 피해자와 돌아가신 피해자 두 분의 유족들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전범 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 박진 외교부 장관이 3월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
ⓒ 공동취재사진 |
일본 정부의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강제동원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 채 온갖 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인 원고들은 정신적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1965년 청구권 협정은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고 체결한 것일 수도 있다. 청구권 협정에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에 관하여 명확하게 정하지 않은 책임은 협정을 체결한 당사자들이 부담해야 한다. 이를 피해자들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대법원 판결로부터 4년 반이 지난 지금 과연 피해자들의 고통은 끝났는가?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마주하고 있는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그 어떤 책임도 이행하지 않고 있는 전범 기업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은 영원히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있는가?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1차 한일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 그리고 이번 2차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 윤석열 정부의 처참한 역사인식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의 역사인식 속에서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되찾으려 했던 인간의 존엄, 인권, 평화에 대한 존중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윤석열 정부는 피해자들의 인권과 역사를 무시한 대가로 얻어 낸 '한미일 군사협력'을 성과로 치장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한 대화가 아니라 군사적인 대결을 부추기는 한미일 군사협력은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위기에 빠뜨릴 위험마저 안고 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은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 이웃나라 사람을 '무릎 꿇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과거청산을 통해 평화를 실현하려고 이미 오래 전부터 손잡고 연대해 왔다.
▲ 김영환 /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
ⓒ 김영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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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20회 역사인식과 동아시아 평화포럼'(2022년 11월 12~13일, 도쿄)의 발표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며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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