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파파이오아누 “화가의 눈으로 공연예술을 합니다”
시와 추상화를 보는 듯 무대 위에 초현실적 이미지 구현
지난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은 마치 그리스 고대 미술이 스타디움 안에서 움직이는 듯한 환영을 보여줬다. 당시 스타디움에 모인 관객은 물론 TV를 통해 개막식을 관람한 전 세계 시청자들은 그리스 문명과 인류의 발전상을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형상화한 모습에 매료됐다. 당시 개·폐막식을 총연출한 인물은 연출가·안무가·무대 디자이너·배우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그리스 출신 전방위 예술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59).
파파이오아누의 작품은 한 편의 시나 추상화를 보는 듯한 미감이 특징이다. 인체의 변형과 왜곡, 조형적 결합을 통해 몸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무대 위에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지난 2017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초청된 ‘위대한 조련사’는 파파이오아누의 세계적인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파파이오아누가 6년 만에 내한, 오는 12~14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신작 ‘잉크’를 공연한다.
파파이오아누는 9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잉크’ 기자간담회에서 "이 작품은 연극도 아니고 무용도 아니다. 장르를 딱히 규정하기 힘들지만 무용과 연극, 퍼포먼스 아트의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나는 전통적인 연극 연출가나 안무가의 스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만의 길을 찾아서 작품을 만든다”고 밝혔다. 이어 “‘잉크’를 비롯해 평소 작품을 만들 때 미리 서사를 정해두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소재를 발견하는 편이며, 몸을 움직이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표현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2020년 9월 이탈리아 토리노 댄스 페스티벌에서 초연한 ‘잉크’는 우주의 기원인 ‘물’을 핵심 소재로 하며 인간의 신체와 시각예술을 결합해 특유의 무대언어를 보여준다. SF 공포영화, 베트남전쟁으로 숨진 태아, 일본 춘화 속 문어 형상, 그리스 신화에서 아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등 다양한 이미지가 등장한다. 물줄기가 무대 전체에 흩뿌려지는 가운데 두 남자가 서로 끌어당기면서도 밀어내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번에 파파이오아누는 3회 공연 가운데 두 차례 직접 출연도 할 예정이다.
물을 소재로 삼은 이유에 대해 그는 “물을 의식적으로 선택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물이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변형·용해하며 빛을 흡수·반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좋아한다”면서 “무대에 물이 존재하면 리얼리티와 함께 여러 은유적 해석이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목인 ‘잉크’는 항상 내 작품의 제목을 지어주는 친구가 공연 중 등장하는 문어를 보고 떠올린 것”이라면서 “문어의 먹물이 인간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처럼, 신체를 변형해 정신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원래 아테네 미술학교에서 순수 미술을 전공한 파파이오아누는 화가와 만화가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미술학교 시절부터 그리스의 무용단들에서 무대, 의상, 분장 디자인을 맡으면서 무용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퍼포머와 안무가로도 훈련받기 시작했다. 1986년 미국 뉴욕에 현대무용을 공부하던 중 ‘실험연극의 거장’ 로버트 윌슨의 공연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서사가 없는 이미지극으로 공연예술의 경계를 확장한 윌슨과의 만남은 그가 창작 영역을 회화에서 공연예술로 옮기는데 자극을 줬다. 1986년 그리스로 돌아와 ‘에다포스 댄스 시어터’를 창단한 그는 피지컬 시어터·무용·퍼포먼스가 결합한 작업으로 명성을 쌓았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아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춤을 배우면서 새로운 표현을 위한 길을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공연예술은 시각예술에 밀착됐던 제가 다른 예술가들과 소통하게 해준 장르에요. 계급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동시대 사람들과 자유롭게 접촉한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제가 전방위 예술가의 면모를 발휘하는 건 미술 분야에서 공연예술로 옮겨온 덕분입니다. 작품의 종류나 규모와 관계없이 창작에 관련한 모든 요소를 컨트롤하는 게 제 작업방식인데,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화가의 눈으로 공연예술을 하고 있습니다.”
‘무대 위의 시인’으로 불리는 파파이오아누의 작품은 상징으로 가득 차서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내 역할은 행동하는 것일 뿐 작품을 분석하는 건 다른 사람 몫이다. 관객은 공연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대 위의 시인’은 예술가로서 내 의도를 정의하는 수식어 같다. 시인의 어원은 원래 ‘하다’에서 온 것으로 무언가 행동하는 사람이 시인이다”라고 피력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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