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피해 여성을 아내로 착각…트럼프, 성추행 66억 배상 패인은
도널드 트럼프(76) 전 미국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성폭력 및 명예훼손에 대한 책임을 묻는 민사소송에서 패소했다. 배심원단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원고인 E 진 캐럴(79)에게 약 500만 달러(약 66억원)를 배상하라는 평결을 내렸다. 2024년 대선 주자 가운데 선두를 달리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뉴욕 남부연방지방법원 배심원단은 이날 트럼프 전 대통령이 27년 전 캐럴에게 성폭력을 행사하고, 이후 그를 거짓말쟁이로 낙인찍어 명예를 훼손했다고 평결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NBC뉴스는 "이번 판결은 미국 전직 대통령에게 성범죄에 대해 민사상 책임을 부여한 최초 사례"라고 전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을 상대로 제기된 성범죄 의혹과 추문 중 법원이 책임을 인정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성폭행" 주장은 기각, "성폭력"은 인정
이번 판결은 캐럴이 트럼프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 결과다. 형사적 유·무죄에 대한 판단이 아니어서 인신 구속이나 벌금은 해당하지 않는다. 배심원단은 만장일치로 성적 학대(sexual abuse)에 대해 200만 달러(약 26억5000만원), 명예훼손에 대해 300만 달러(약 39억7000만원)를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배심원단은 원고 측 핵심 청구원인인 성폭행(강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캐럴은 1995년 또는 96년 뉴욕 맨해튼 고급백화점 버그도프 굿맨에서 트럼프에게 성폭행당했다며 2019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17년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 파문으로 촉발된 '미투' 운동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캐럴은 재판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범죄를 상세히 진술했다. 백화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트럼프가 여성용 선물 고르는 것을 도와달라고 제안했고, 이에 응해 속옷 코너에 함께 갔다가 탈의실에서 성폭행당했다고 밝혔다. 캐럴은 당시 패션잡지 '엘르' 칼럼니스트로 일했다.
현직일 때 피소된 트럼프는 성폭행을 부인했고, 이 과정에서 캐럴을 "완전한 사기", "거짓말쟁이" 등으로 불렀다. 캐럴이 2019년 출간한 회고록을 많이 팔기 위해 억지 주장을 펴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배심원단은 트럼프가 명예를 훼손했다며 캐럴 손을 들어줬다.
원고를 아내로 착각…"취향 아니다" 설득력 떨어져
형사사건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beyond reasonable doubt)" 엄격한 증거를 기반으로 유·무죄를 입증해야 하지만 민사 사건은 원고와 피고 중 더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출하는 쪽이 유리하다. 캐럴 측은 인터뷰 중 강제로 키스 당한 여성 기자,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다가 성추행당한 여성 등을 증언대에 세웠다.
반면 트럼프 측은 적극적 방어 대신 캐럴 주장의 신빙성을 공략했다. 트럼프는 재판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고 증언할 권리도 포기했다. 다른 증인도 부르지 않았다. 다만, 지난해 10월 영상 녹취로 증언했는데, 이때 한 발언과 행동이 오히려 배심원단의 표를 잃었을 가능성을 CNN은 제기했다.
트럼프는 캐럴이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성폭행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캐럴 측 변호인은 트럼프에게 1980년대 한 여성과 찍힌 흑백사진을 보여주며 누구냐고 물었다. 트럼프는 '이 사람은 말라다. 내 아내"라고 답했다. 이 여성은 실제로는 캐럴이었다. 캐럴을 두번째 부인인 배우·모델 출신 말라 메이플스로 오인한 장면은 "취향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옹색하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여성 움켜쥘 수 있다?"…트럼프 패착
캐럴 측 변호인단은 트럼프가 거물이 되면 성폭력을 저질러도 문제 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한 2005년 발언을 소환했다.
변호인이 트럼프에게 '스타는 여성의 XX도 움켜쥘 수 있냐?"고 묻자 트럼프는 "과거 백만년을 돌아보면 대부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불행하게도, 또는 다행스럽게도"라고 덧붙였다.
자신을 스타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트럼프는 "그렇다고 볼 수 있다"고 답했다. 해당 부분 영상 증언은 법정에서 재생됐다. 권력형 성폭력에 무감한 트럼프의 행동 및 사고 패턴을 보여줬을 것으로 보인다. MSNBC는 이번 소송에서 "트럼프에게 가장 불리한 증언을 한 사람은 트럼프"라면서 "트럼프는 자신의 최악의 적이었다"고 분석했다.
배심원단 9명은 뉴욕주 거주 남성 6명, 여성 3명으로 구성됐다. 직업은 물리치료사, 전직 경비원 등 다양했다. 재판장은 배심원단이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 공격받을 가능성 등을 고려해 이름과 거주지, 근무지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트럼프 "역사상 최대 마녀사냥…항소"
캐럴은 성명을 통해 "오늘 세계는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됐다"면서 "이 승리는 저뿐만 아니라 믿어주지 않아 고통을 겪은 모든 여성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판결 직후 소셜미디어에 전부 대문자로 “나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면서 “역사상 최대 마녀사냥이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측은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측 변호인은 판결 직후 기자들과 만나 항소할 만한 "충분한 쟁점(plenty of issues)"이 있다면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뉴욕 법원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보장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직은 2024년 대선 가도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기 어렵다. 로이터통신은 공화당 전략가를 인용해 반(反)트럼프 진영과 골수 지지층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번 판결로 인한 부정적 영향은 교외 거주 여성과 중도 성향 공화당원에게 제한적일 수 있다고 전했다.
ABC뉴스는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최대 악재였던 '여성의 XX를 움켜쥘 수 있다'는 녹취처럼 권력형 성범죄가 "불행하게도, 또는 다행스럽게도" 지속해왔다는 등 부적절한 인식이 2024년 대선에서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park.hy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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