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의 시시각각] 히로시마의 세번째 충격
■
「 29년 공원 밖 방치, 한 서린 위령비
한일 정상 공동참배 결단은 획기적
'워딩' 소환보다 '행동'이 더 값지다
」
#1 종전 60년을 사흘 앞둔 2005년 8월 3일 히로시마에서 만난 쓰보이 스나오씨. 당시 80세.
평화기념공원 내 원폭 돔 앞에서 눈시울을 붉힌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의 증언은 충격이었다.
히로시마대 2학년이던 그는 피폭 중심지에서 1㎞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섬광을 느낀 직후 몸이 10m가량 퉁겨져 나갔다.
의식을 되찾을 때는 심한 화상으로 온몸의 피부가 시커멓게 타 축 늘어져 있었다.
뿌연 하늘 아래 1주일 동안 "나쁜 미국놈들!"을 외치며 미친 듯이 거리를 돌아다니다 의식을 잃고 말았다.
40일 만에 깨어났지만 1년 동안 일어나질 못했다. 방사선으로 척수가 파괴되고 빈혈이 심해서다.
더 아팠던 것은 마음속 상처라 했다.
"딸이 다섯 번이나 유산할 때 가슴이 찢어졌다. 피폭자인 내 탓인 것 같아 정말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로부터 8년 후. 나에겐 또 다른 '히로시마 충격'이 있었다.
지금은 회사를 떠난 한 선배가 쓴 칼럼 때문이었다.
그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신의 징벌'이자 일본 군국주의에 희생된 아시아인의 복수라고 했다.
아베의 언행을 비난하면서 "일본에 대한 불벼락이 부족하다고 판단하는 것도 신의 자유"라 썼다.
이 칼럼 때문에 도쿄총국 건물에는 한 달 넘게 우익단체 차량이 몰려왔다. 상냥하던 일본 지인들도 얼굴을 붉히며 따져 물었다. 난 고개를 숙였다.
가장 괴로웠던 건 "그럼 당시 희생된 무고한 수많은 한국인은 뭐냐. 그들도 신의 징벌을 받은 것이냐"는 재일교포들의 울분에 찬 항의였다. 난 대신 속죄했다.
#2 그랬다. 히로시마에서 원폭 투하로 희생된 한반도 출신자는 2만 명이 넘는다. 히로시마 전체 희생자의 13%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갔거나 일제 치하에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 현해탄을 건넌 이들이다.
현재 히로시마 평화공원 안에 우뚝 서 있는 한국인 희생자위령비는 이들을 기리는 상징이다.
여기엔 우리 민족의 비극과 눈물이 배어 있다.
먼저 조선 왕족 이우(1912~45)의 비극적 죽음이 그렇다.
이우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일본의 회유에 끝까지 저항한 의친왕의 차남이다. 한국어를 쓰며 비밀리에 독립 자금을 모았다.
당시 이우는 출근길에 원폭을 맞았다. 오후 늦게 원폭이 터진 곳 근처에서 발견됐지만 다음 날 숨을 거두고 말았다.
피폭 재일동포들에 대한 차별 또한 우리에겐 지우기 힘든 눈물의 역사다.
교민들은 기념공원 안에 추모비를 건립하려고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히로시마시는 이를 거부했다. 공간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쩔 수 없이 재일동포들은 1970년 공원 밖에 위령비를 세웠다. 29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그러나 교민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위령비는 99년 현 위치로 옮겨졌다.
난 그들이 가졌을 깊은 한(恨), 불굴의 희생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존경스럽다.
#3 다음 주 그곳 히로시마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린다.
히로시마 출신의 기시다 총리는 '핵 없는 세상'을 외친다.
그런 기시다가 지난 7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한국인 희생자위령비를 참배하겠다"고 했다.
솔직히 이번엔 놀랍고 기쁜 버전의 '히로시마 충격'이다.
원폭을 떨어뜨린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2016년 히로시마 평화공원 위령비를 찾긴 했지만, 걸어서 2분 거리의 한국인 위령비는 찾지 않았다.
기시다로선 한국과 손잡고 핵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게다.
하지만 어찌 보면 태평양전쟁, 강제징용자에 대한 반성과 사죄로 읽힐 수 있는 한국인 위령비 참배에 나선다는 건 용감한 결단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많은 이가 '통절한 반성'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1998년의 워딩(말)'을 소환시키려고 한다. 물론 필요하다.
허나 그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2023년의 행동'이야말로 소중하고 값진, 우리가 갈구하던 동행의 가치 아닐까.
다음 주 히로시마의 맑은 하늘 아래 두 정상이 그 첫걸음을 떼길 기대한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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