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뉴욕과 보스턴의 혁신 생태계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혁신 클러스터인 ‘뉴랩’(New Lab)을 방문한 적이 있다. 과거 미국 해군 조선소였던 네이비 야드(Navy Yard)를 개조한 그곳에서 현대 세계 해전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전함이 건조됐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며 연합국 승리의 상징이 된 미군 전함 미주리호도 거기서 만들어졌다. 미주리호는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가장 먼저 도착해 굵직한 전투에서 맹활약했고 ‘흥남 철수작전’에도 참여해 대한민국과 인연이 깊은 전함이다.
네이비 야드는 20세기 들어 미국을 세계 패권국으로 만들고 자유 진영을 지켜낸 수많은 전함을 건조한 곳이다. 지금 네이비 야드는 21세기 미국의 기술 패권을 지키기 위해 과학기술로 무장한 첨병들이 태동하는 현장이다. 그런 역동적인 현장을 둘러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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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오·수소 등 성장동력 발굴
창의적 인재들 자유로운 교류
윤 정부 과기정책에 참고할 만
」
그곳에서 필자는 특별한 자부심을 느꼈다. KIST의 수소 기술을 기반으로 KIST 출신 한국인들이 창업한 스타트업이 그곳에서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이 기업은 암모니아에서 수소를 뽑아 연료전지로 전력화하는 첨단기술을 드론·트랙터·화물트럭·선박에 확대 적용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수소는 경제적·산업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국가안보 차원에서도 비중이 큰 국가전략 핵심 기술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낮은 경제성에 발목 잡혀서 아직 연구실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조금 먼 미래의 기술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미래에 열릴 시장을 연구개발 영역으로 끌고 오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투자자와 산업계가 주목하는 혁신을 창출할 수 있음을 뉴랩의 스타트업은 보여주고 있었다.
뉴욕의 뉴랩에서 북쪽으로 300㎞ 정도 떨어진 보스턴에는 첨단 바이오·의료 혁신클러스터가 자리 잡고 있다. 바이오·의료 기술도 연구실을 벗어나기 어려운 영역이었지만, 보스턴의 혁신적 창업가들은 미래 성장동력을 찾으려는 기업의 요구를 연구 현장으로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역사와 전통의 도시 보스턴은 샌프란시스코·샌디에이고를 추월해 세계 최대의 바이오·의료 혁신 도시로 거듭났다.
윤석열 정부는 앞서 언급한 수소와 첨단 바이오를 포함해 반도체·양자 등 12대 국가전략기술을 선정해 이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국가전략기술은 미국과 중국의 기술패권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상황에서 선정됐다. 안정적 공급망 확보와 하락 일변도의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릴 신산업 육성은 물론 국가 외교·안보 관점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이와 함께 국가 전략기술 육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컨트롤타워를 정비하는 등 전략기술을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도 마련했다.
뉴욕의 뉴랩과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의 성공 요인은 미래시장을 연구개발 영역에 접목해 혁신을 선도하는 시장 메커니즘이다. 이를 통해서 우수 인재들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혁신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 과거와는 달리 요즘 우수 인재들은 단순한 보상이나 지위에 움직이지 않고, 그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있는 곳으로 모이기 때문이다.
아직 열리지 않은 미래 시장을 끌어와 연구에 접목함으로써 전 세계로부터 인재들이 몰려와 경쟁하고, 그들이 만든 최고의 기술이 선택되는 혁신 생태계가 바로 윤석열 정부가 지향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글로벌 스탠더드가 뿌리내린 연구현장을 구현하기 위한 출발점은 인재다. 과학기술 관련 대통령 일정에 과학자들과의 만남이 빠지지 않는 것은 미래를 결정하는 열쇠가 과학기술이고, 그 중심에 과학자들이 있다는 메시지가 묻어난다.
정부는 연구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과거 연구기관들이 인재 채용에 어려움을 겪게 했던 일률적인 블라인드 채용 방식을 폐지했고, 기업들의 발목을 잡아 세계적 수준의 연구를 방해하는 ‘모래주머니’를 과감하게 제거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인재들이 마음껏 연구하고, 창의력을 바탕으로 미래시장을 연구현장으로 끌어올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이 이 시대에 부여받은 시대적 사명이라 생각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윤석진 KIST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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