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외교의 귀환, 샴페인은 이르다
지난달 18일 프랑스 파리 외교부 청사. 보안검색대를 지나 본 건물로 이어지는 복도엔 우크라이나 전쟁 현장을 담은 액자들이 빼곡했다. 언제 포탄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꿋꿋이 출근하는 여성, 아빠의 손을 꼭 잡은 소녀의 표정은 담담해서 되레 슬펐다. 국민의 삶을 평온히 지키는 것이 외교의 숨은 역할이라는 점을 웅변했다. 직접적 당사자가 아닌 프랑스의 외교부가, 모든 방문객이 지나가는 이 복도에 이들 액자를 걸어둔 의미는 크다. 미·중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외교를 리드하겠다는 포부가 엿보였다. 프랑스 외교부는 이번에 한국뿐 아니라 인도·일본·호주의 주요 매체 기자들을 초청했다. 외교부와 대통령실 엘리제궁의 고위·실무 관료들, 그리고 관련 학자들은 프랑스의 인도·태평양 정책을 유창한 영어로 설명했다. 이들은 궁금해했다. 한국의 인·태 정책 조직은 어떻게 꾸려졌고, 예산은 어떻게 되는지.
윤석열 대통령의 한·미, 한·일 정상회담은 의미가 컸다. 그러나 샴페인은 여기까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 대통령의 ‘아메리칸 파이’를 듣고 박수를 치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횡성 한우 불고기를 두 접시 비웠다고 해서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다단한 국제정세 매듭이 풀리진 않는다. 매듭을 풀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에 만족해선 안 될 일이다. 북한을 위한 외교가 아닌 한국 자신의 국익을 위한 외교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국제정세의 체스판은 한국에 절대 유리하지 않다. 어찌 보면 격동의 구한말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외교 난타전이 펼쳐질 것이다. 최근 찾은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일본과 조선의 운명을 가른 씨앗은 이곳에서 움텄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조슈(長州) 출신 5인, 일명 ‘조슈 파이브’가 밀항을 감행하며 서구 문물을 배우고 일본 경제와 산업 발전의 초석을 닦은 곳이다. 한국엔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정신적 지주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며, 정한론(征韓論) 등으로 반일감정이 극으로 치닫는 곳이지만,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의 국익을 위해 돌아볼 점은 분명히 있다. 이곳에서 만난 가이드, 와타나베는 “‘조슈 파이브’는 서구 문물을 밤낮으로 흡수하며 새로운 나라 건설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라고 자부했다. 외교의 문을 걸어 잠그고 쇄국의 막다른 길을 택한 조선의 오판이 떠올랐다.
동북아가 들끓고 있다. 윤 정부의 실리 외교 귀환이 반갑다. 하지만 자화자찬은 금물이다. 숨 가쁘게 변하는 세계 외교에 동참하려면 더욱 예민한 촉수를 세워야 한다. 국익과 실리, 잠시라도 방심할 틈이 없다. 최소한 100년 전과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전수진 투데이·피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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