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인생 첫 빈티지 시계 입문기

김지회 2023. 5. 10.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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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견딘 시계의 가치에 대하여.
18K 옐로골드 21mm 파텍 필립을 착용한 모습이 자주 포착됐던 다이애나 빈.

‘나는 왜 그동안 시계가 없었을까?’

시계 기사를 준비하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산더미 같은 옷과 지네만큼 다리가 많아도 다 신지 못할 신발들, 양팔 가득 들어도 손이 모자란 가방들은 매달 화보 촬영을 준비하며 익숙하게 마주하는 풍경이다. 아주 잠깐 쇼룸처럼 펼쳐지는 공간에서 위시리스트에 하나둘 갖고 싶은 아이템을 넣어보지만, 유독 그 안에 시계만큼은 빠져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상상한 첫 번째 시계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시계’라든가 ‘사랑하는 사람과 인그레이빙을 새겨 맞춘 시계’ 같은 평범하지만 결코 흔하지 않은 나만의 이야기를 가진 것이었으니까.

재클린 케네디는 존 F. 케네디가 세상을 떠난 후 블랙 룩에 다른 주얼리 없이 탱크만 매치하며 애도의 시간을 보냈다.

모은 돈으로 구입할 기회도 적지 않았지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가격도 아니었다. ‘스틸보다 골드가, 소가죽보다 악어가죽이 클래식하지! 환금성을 생각하면 다이아몬드도 좀 박혀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보기 시작하면 ‘한 달 월급 없었다고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던 가격은 이미 차 한 대 가격이 훌쩍 넘어가 있었다. 그렇게 닫혀버린 마음에도 자꾸 문을 두드리는 시계가 있었다. 탱크 루이 까르띠에 워치였다. 실제로 탱크에서 영감받은 아르데코식 케이스에 클래식한 로마숫자 인덱스, 철길 모양의 미닛 트랙이 더해진 다이얼, 크라운에 볼록하게 솟은 블루 사파이어 카보숑 컷은 기계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We, the Women〉 촬영장에서 필름 카메라를 잡은 잉그리드 버그만.

여기에 블랙 니트 톱과 다른 주얼리 없이 시계만 매치한 재클린 케네디의 사진이나 사파이어 링과 시계를 찬 다이애나 빈, 사각 뿔테 안경에 셔츠 아래로 시계를 슬쩍 보이게 연출한 이브 생 로랑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시계를 사야 끝나는 주술에 걸린 것 같았다. 결국 빈 손목을 멍하니 보다가 수소문을 거쳐 스타일리스트 박선용이 운영하는 빈티지 시계 숍을 방문했다. “촬영 스타일링 소품으로 하나둘 모으다 보니 너무 많아져서 ‘빈티크’를 오픈하게 됐어요. 한 가지 브랜드만 찾는 컬렉터부터 브랜드에 입문하기 전 경험을 쌓기 위해 오는 분까지 요즘은 고객의 폭이 훨씬 다양해졌죠.” 옷이 가득한 쇼룸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그가 시계들을 꺼내며 말했다.

칸영화제에서 까르띠에 베누아를 찬 카트린 드뇌브.

세월이 느껴지는 빛바랜 컬러들, 마치 등본을 뗀 것처럼 만들어진 시기와 소재, 무브먼트 등 시계 정보를 새긴 것들을 보니 왜 사람들이 자신의 나이와 같은 생산 연도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 것 같았다. 패션 아이템 중 시계만큼 명확하게 출처를 간직하고, 원한다면 매일 함께할 수 있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친구가 곁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이애나 빈은 폴로 경기장에 블루 사파이어 링과 두 개의 파텍 필립 워치를 레이어드한 스타일링을 보여줬다.

각기 다른 사람과 사연을 함께했을 시계 중에서 나는 가장 속을 알 수 없는 블랙 래커 다이얼에 인덱스가 없는 탱크 머스트 워치로 결정했다. 실버에 도금이 된 시계는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최근 제네바에서 공개된 골드 탱크 루이와 비슷해 동시대적 느낌을 지니면서도 훨씬 저렴해 입문용으로 부담이 덜했다. “빈티지 시계는 요즘보다 크기가 작기 때문에 차는 방식도 달라야 더 멋스럽게 연출할 수 있습니다. 가죽 스트랩은 손목뼈보다 몸 안쪽으로 내려서 꼭 맞게 차야 손목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클래식해 보여요. 브레이슬릿 스트랩은 자국이 남지 않도록 팔찌처럼 조금 느슨하게 차는 것을 권합니다.” 시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그의 조언이다. 똑같은 시계는 차기 싫어서 혹은 디자인의 희소성 때문에 빈티지 시계를 찾으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로 살펴보다 내려놓기 일쑤였던 쇼핑이 정품 감정서와 A/S 가능한 부분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마무리됐다.

1982년 파리에 있는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이런 소비를 하는 이가 많아졌기 때문일까? 시계의 가치와 수명을 늘리기 위한 전략은 브랜드에서도 이미 확대되고 있다. 피아제는 스위스 작업장에서 마스터 워치메이커가 빈티지 워치를 직접 복원하는 시스템을 갖췄고, 롤렉스는 올해부터 정품을 감별해 보증서를 발급하고 직접 중고 롤렉스를 판매하는 네트워크를 갖추는 등 빈티지 워치 수요가 점점 파이를 키우고 있다. 시계를 구입한 후 약 2주가 흘렀다. 그간의 아침은 조금 변화가 있었다. 먼저 세월이 느껴지는 시계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빳빳하게 셔츠를 다려 입고, 손끝의 큐티클을 더욱 정성스럽게 정돈했다.

앤디 워홀은 까르띠에 탱크를 좋아했던 인물 중 한 명이다.

어떤 날은 ‘딸깍’ 하고 디버클을 채우며 신발 끈을 조이는 기분을 만끽했다. 시계를 보며 잠시 잊고 지냈던 글귀가 떠오르는 날도 있었다. “오래 시간을 순명하게 살아나온 것,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박노해의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의 구절처럼 누군가와 정직한 시간을 보냈을, 속이 까만 친구는 오늘도 내 곁에서 새로운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낡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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