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대 걸그룹 전성시대…뻔한 사랑노래 안 부른다
4세대 걸그룹 에스파·르세라핌·아이브가 잇따라 복귀하면서 국내 음반 시장이 뜨겁다. 자기애를 바탕으로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거나, 독특한 감성이나 세계관을 내세운 이들의 퍼포먼스에 시장이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양새다.
특히 음반 판매량 각축이 치열하다. 9일 SM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전날 발매된 에스파의 세 번째 미니음반 ‘마이 월드’(MY WORLD)는 한터차트 기준 발매 첫날 137만2929장이 팔려나가 K팝 걸그룹 신기록을 달성했다. 지난 1일 첫 정규앨범 ‘언포기븐’(UNFORGIVEN)으로 돌아온 르세라핌이 발매 당일 102만4034장을 판매하며 세운 역대 걸그룹 1위 기록을, 1주일여 만에 에스파가 갈아치운 것이다. 에스파와 르세라핌은 ‘본 핑크(Born Pink)’의 블랙핑크에 이어 발매일 하루 만에 100만장 음반 판매를 달성한 밀리언셀러 걸그룹이 됐다.
아이브는 음원 차트에서 힘을 내고 있다. 역시 4세대 걸그룹인 뉴진스는 올해 1월 2일 발표한 ‘디토’(Ditto)로 국내 최대 음원플랫폼 멜론에서 99일 연속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 자리를 아이브가 이어 받았다. 지난달 10일 발매한 정규 1집 ‘아이해브 아이브’(I’ve IVE)의 타이틀곡 ‘아이 엠’(I AM)과 선공개곡 ‘키치’(Kitsch)가 멜론에서 8일까지 약 한 달 간 차트 1·2위를 굳건하게 지켰다.
4세대 걸그룹은 섹시 콘셉트가 두드러지지 않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 걸그룹과 차별화된다. 주체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콘셉트로 내세웠다.
르세라핌은 ‘언포기븐’에서 역경에 굴하지 말고 함께 가자는 메시지를 녹여냈다. 멤버 김채원은 지난 1일 쇼케이스에서 “타인의 평가에 기대지 않고 르세라핌만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앨범”이라고 소개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타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그에 대한 용서도 구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담았다.
아이브 역시 나르시시즘(자기애)을 소재 삼아 ‘내가 가는 길에 확신을 가지자’는 주체적인 삶의 태도를 노래한다. ‘일레븐’(ELEVEN), ‘러브 다이브’(LOVE DIVE), ‘애프터 라이크’(After LIKE)로 이어지는 세 싱글 곡이 연애에 빠진 자아를 얘기했다면 이번 타이틀 곡 ‘아이 엠’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 자체에 집중했다.
이에 대해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연애보다는 꿈과 자아실현, 아이덴티티(정체성)를 가꾸는 데 관심 있는 요즘 젊은 세대의 분위기가 많이 반영됐다”고 짚었다. “연애 리얼리티가 넘쳐나는 예능과 달리 가요계, 특히 최근 아이돌 노래에서는 내가 영감을 얻을 수 있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콘셉트에 집중하다 보니 연애나 이성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주로 무대 퍼포먼스에 치중하는 걸그룹에게는 걸크러쉬나 당당한 콘셉트가 더 잘 맞는다. 굳이 섹시 콘셉트라는 프레임으로 스스로를 옭아맬 필요가 없어졌다”고 짚었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걸그룹 팬층이 과거엔 남성 위주였다면 요즘엔 여성 팬층도 두터워졌다”며 “아이돌의 콘셉트는 주 소비층인 팬들의 성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이들이 성적인 어필을 담은 메시지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독특한 세계관으로 팬들과 꾸준히 교감해 온 에스파는 이번 미니 3집 ‘마이 월드’에서 현실로의 복귀를 택했다. 이전 ‘광야’라는 가상세계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김도헌 평론가는 “이번 앨범은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와의 경영권 분쟁이 마무리된 이후 SM의 첫 프로젝트인만큼 기존 세계관에서 빠져나와 자유롭고 색다른 느낌을 꾀한 것 같다”고 말했다.
에스파는 그러면서도 가상 세계를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않은 모습이다. 가상세계 ‘블랙 맘바’와의 전투에서 멤버들을 도왔던 가상 인간 ‘나이비스’가 수록곡 ‘웰컴 투 마이 월드’(Welcome To MY World)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멤버 카리나는 “이번 음반 이후 세계관 시즌3가 나올지는 미정”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데뷔 1년도 되지 않은 뉴진스는 공식 활동 종료 이후에도 꾸준히 음원 차트 순위권에 자리하고 있다. 정민재 평론가는 “10대, 그 나이대 친구들의 생각과 꾸밈새를 그대로 보여주는 팀이 뉴진스 외엔 없다보니 젊은 세대는 열렬히 반응하고 기성 세대는 향수와 공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환희 기자 eo.hwa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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