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 장례식서 아리랑 연주…백마고지 전투 용사의 유언이었다

이보람 2023. 5. 1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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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전투에서 생존한 룩셈부르크 참전용사가 90세 일기로 별세했다. 질베르 호펠스씨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6·25 한국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살아남은 룩셈부르크 참전용사의 장례식에서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8일(현지시간) 룩셈부르크 레미히의 한 성당에서 6·25 전쟁 참전용사인 질베르 호펠스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호펠스는 지난달 24일 현지 병원에서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룩셈부르크 한국전 참전협회장을 맡을 정도로 활발히 활동했지만, 고령의 나이에 입·퇴원을 반복하다 결국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이날 장례식에선 특별 추모곡으로 아리랑이 연주됐다. 고인은 생전 작성한 유언장에 “장례 미사에서 아리랑을 불러달라”고 적었다.

이를 발견한 조카 파스칼 호펠스(62)는 고인의 뜻을 박미희 룩셈부르크 한인회장에게 전달됐다. 이에 박 회장은 호펠스의 장례 미사 중 특별순서로 아리랑을 불렀다. 연주는 고인이 재직했던 세관의 관악단이 맡았다.

고인은 생전 유독 아리랑 곡조를 좋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지난 2019년 한국전쟁유업재단과(KWLF)의 인터뷰에서 직접 카메라 앞에서 아리랑 첫 소절을 불렀다. 지난해 11월 그의 마지막 생일파티에서도 생일 축하곡으로 아리랑이 연주됐다.

질베르 호펠스씨의 한국전 참전 당시의 모습. [연합뉴스]

이날 장례식은 박 회장 외에도 박성호 주벨기에 유럽연합(EU) 한국대사관 무관(대령)과 가까운 가족 등이 참석해 소규모로 진행됐다. 고인의 슬하에는 자녀가 없고, 아내는 수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 참석한 박성호 대사관 무관은 국가보훈처에서 제작한 추모패를 유족에게 전달했다. 조카 파스칼은 “지금으로 치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것과 비슷한 것”이라며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그 먼 나라에 자원해 갔는데, 그런 삼촌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또 유가족은 조카손주가 고인의 영향을 받아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면서 그가 생전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였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인은 1951년 병역의무 이행을 위해 입대한 후 자원해서 한국전에 참전했다. 군 복무가 끝나갈 무렵이라 부모가 반대했으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52년 3월 부산에 도착한 그는 백마고지 전투 등에서 벨기에대대 소속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그해 강원도 철원 일대에서 국군 9사단이 중공군과 격돌했던 전투로, 6·25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벨기에대대 일등병이자 기관총 사수로 임무를 수행한 호펠스는 치열한 전투 끝에 살아남았고 이듬해 1월 룩셈부르크로 복귀했다. 호펠스가 참전 당시 기록했던 일기는 현재 룩셈부르크 전쟁박물관에 사료로 전시돼 있다.

전선 한복판에서의 기억은 한국에 대한 평생의 관심과 애착으로 이어졌다. 참전 뒤 룩셈부르크 세관에서 일한 그가 업무와 무관한 한국 역사에 대한 책도 다수 읽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실제로 그는 KWLF과 인터뷰에서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아직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에 사과해야 한다”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이 외에도 최소 열 차례 보훈처의 참전용사 재방한 행사 등에 참석했다.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 파병 당시 인구 20여만 명에 불과했으나 100명(연인원 기준)의 전투 병력을 참전시켰다. 그가 사망하면서 룩셈부르크에 생존한 한국전 참전용사는 2명으로 줄었다.

이보람 기자 lee.boram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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