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작가의 <토지>가 완성된 곳

운민 2023. 5. 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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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여생을 보냈던 원주 저택과 문학공원

[운민 기자]

▲ 문학공원 문학공원에 자리한 박경리작가의 동상
ⓒ 운민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송강 정철을 비롯해 임경업 장군, 조선에 고구마를 처음으로 보급했던 조엄 선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원주와 인연을 맺고 있다. 하지만 박경리 작가만큼 원주 시민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없지 않을까 싶다.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이는 주택가 한복판에 자리 잡은 그녀의 옛 집을 중심으로 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몇몇 작가들은 이곳에 상주하며 창작활동을 활발히 이어간다. 우리나라 문학을 대표하는 박경리 작가와 원주의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 박경리 작가가 손수 써내려간 토지의 원고 박경리 작가가 손수 써내려간 토지의 원고
ⓒ 운민
 
사실 그녀의 출생지는 경남 통영이다. 작가의 대표작인 <김약국의 딸>의 주요 배경이 되었고, 작품마다 박경리 작가의 진한 향토적 서정이 묻어 나온다. 하지만 박경리 작가는 처음부터 작가의 길을 꿈꾸지 않았다.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중매결혼을 거쳐 평범한 생활을 보내던 중 김동리 작가의 눈에 들어 등단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의 딸은 저항시인 김지하와 결혼했는데 독재정권에 대항하느라 수많은 옥살이를 거쳐야만 했다. 후에 원주에 정착한 김지하 부부를 따라 박경리 작가도 아무런 연고가 없는 원주 단구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당시(1980년) 1969년부터 저술하기 시작한 최고의 대작 <토지>를 집필하고 있었다. 이미 1부부터 3부까지 출판이 되었지만 4부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상태였다. 하동의 작은 마을 평사리에서 살던 사람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격변기에 휩쓸리고 멀리 만주 용정으로 쫓겨나 다양한 형태의 인간군상의 모습을 보이는 이 작품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이 진행되며 커져만 갔던 응어리와 한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아 잠시 <토지>를 접어두어야만 했던 것이다.     

마음이 너덜한 채로 원주로 이주한 작가는 이곳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한 듯하다. 원주에서 상황이 비교적 안정되자 자연스럽게 얽히고 설켰던 실타래도 풀린 것이다. 이렇게 26년 동안 지속되었던 <토지>는 빼앗겼던 평사리 땅도 되찾고, 조국해방을 맞이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작가의 노년을 함께 했던 이 집을 방문하기 전, 정면에 보이는 박경리 문학의 집부터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이어진다. 총 5층으로 구성된 이곳은 5층은 세미나실, 2층부터 4층은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부터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의 일생과 문학세계로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된다.
 
▲ 박경리작가가 여생을 보냈던 원주 저택 박경리작가가 여생을 보냈던 원주 저택이 문학공원에 보존되어 있다.
ⓒ 운민
 
4층은 <토지> 이외에 작가의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고, 3층으로 내려가면 <토지>의 친필원고가 일렬로 늘어서있는 흔치 않은 광경을 목도한다. 요즘 작가들은 대부분 글을 컴퓨터로 작성하기에 수정과 덧붙임이 비교적 간단하지만 예전에는 한 글자 한 글자를 원고지에 일일이 써야만 했다.

특히 <토지> 같은 대작은 원고지의 양만 해도 3만 장이 넘는다고 하니 수도승과 마찬가지의 삶을 보내야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등장하는 인물마다 각자의 서사가 살아있고 치밀한 구성이 작품 곳곳에 녹아들어 가 있다. 여유가 날 때 작가의 작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피어오른다.
    
2층으로 내려가면 박경리 작가의 삶의 흐름에 따라 연표와 사진, 시로 구성한 자료들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치열한 집필 활동을 이어가면서 손수 옷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나무로 조각품도 만들었다. 가장 인상적인 유품은 곁에 두고 글 쓰는 데 참고했던 국어사전이다.

이미 너덜해진 사전을 볼 때마다 집필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방문해야 할 장소가 아닐까 싶다. 1층에는 작가의 소설을 구입할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북카페를 거쳐 돌담길을 돌아 들어가면 작가가 18년간 살았던 옛집이 온전히 남아있다. 그렇다. <토지>를 완성한 그곳이다.

입구에는 손수들을 위해 손수 만든 연못이 있고 마당 한편에는 작가가 가꾸던 텃밭이 보존되어 있다. 집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이 공간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운을 얻어갈 수 있을 만하다.     
 
▲ 구룡사 치악산에 자리잡은 구룡사는 많은 설화를 품고있다.
ⓒ 운민
 
이제 원주를 대표하는 명산인 치악산 기슭으로 이어진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답게 산세는 웅장하고 계곡은 한없이 깊다. 우리나라의 웬만한 명산에는 대표하는 명찰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도 구룡사라는 사찰이 유명하다.

원래 이곳에는 깊은 연못이 있었고, 9마리의 용이 있었다. 의상대사가 용을 몰아내고 절을 지으니 구룡사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구는 아홉 구(九)가 아닌 거북(龜) 자다. 

조선 중기 절 입구에 있는 거북모양의 바위 때문에 고쳐 쓰게 했다고 전해진다. 절의 명성에 비해 인상적인 건축과 유물은 별로 없지만 치악산에 웅거해 원주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갈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 용소막성당 원주 신림에 위치한 용소막성당은 강원도를 대표하는 성당이다.
ⓒ 운민
 
이제 원주를 떠나야 할 시간이 머지않았다. 이 도시에서 영월, 제천으로 가기 위해서 중앙고속도로 또는 5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야 한다. 계곡을 따라 남으로 향하는 길은 은혜 갚은 꿩의 설화로 유명한 상원사, 궁예의 흔적이 남아있는 영원산성, 특정기간에만 개방하는 신령한 숲인 성황림 등 가볼 만한 장소가 많지만 다음 답사로 미루고 가장 남단에 자리한 신림면으로 목적지를 정해 달려본다.

이곳에는 산골마을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어주는 만큼 아름다운 성당하나가 우뚝 서 있다. 붉은 벽돌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진 용소막 성당은 병인박해 당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신자들이 모여있던 교우촌에서 발전한 곳이다. 강원도에서 3번째로 건립된 이 성당은 산사 못지않은 고즈넉함이 인상적이다.
     
강원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여실히 보여주는 원주여행이었다. 경기도와 가장 흡사한 원주를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강원도의 고개를 하나씩 넘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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