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고독사 '5·18 시민군'의 쓸쓸한 죽음

김형호 2023. 5. 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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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소총 들고 전두환 계엄군과 싸워, 200일 옥고...굳게 닫힌 장례식장, 화환 하나만

[김형호 기자]

 9일 오전 11시께 광주광역시 서구 한 장례식장에 차려진 5.18민주유공자 허아무(74)씨 빈소. 5월 단체 회장 명의의 화환 하나만 놓여있고, 빈소 문은 닫혀 있다. 고인은 어버이날인 8일 오후 안부를 살피러 월세방을 찾은 인근 주민에 의해 발견됐다.
ⓒ 김형호기자
9일 오전 광주광역시 서구 VIP장례타운.

장례식장 건물 지하에는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허아무개(74)씨의 빈소가 마련돼 있었다.

여느 빈소와는 달리 허씨의 빈소는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닫힌 문 앞에는 5·18단체 회장 명의의 화환 하나만 놓여 있었다. 죽음을 애도하는 가족도, 지인도 없었다.

당초 그의 시신은 다른 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돼 있었으나 장례비용이 마땅치 않아 옮겨졌다고 한다.

5·18단체 한 관계자는 "고인은 5월 단체에 가입하지 않고 거의 평생을 홀로 지내오다 갑자기 돌아가셨다. 수소문해보니 이복형제 등 가족이 계신 것으로 나오지만 왕래가 끊기다시피 한 것으로 안다. 혹시모를 비용 문제 때문에 5월 단체와 협약을 맺은 장례식장으로 고인을 모셔왔다"고 말했다.

고인의 삶은 평생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20대 시절에는 '넝마주이'로 불우한 시절을 보냈고 30대 초반에는 5·18의 한가운데 서게 됐다. 5·18시민군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붙잡혀 고초를 겪었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쓸쓸히 혼자 삶을 꾸려왔다.

젊어서 한때 가정을 꾸린 것으로 안다는 5·18단체 관계자의 전언이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경찰도 이때문에 그의 사망 초기 '무연고 고독사'로 판단했다.

전두환에 저항해 시민군 참여... 200여일간 옥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공개한 군법회의(군사법원) 판결문을 보면, 고인은 1980년 5월 22일부터 광주 금남로 등지에서 여공 등 시민들과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줄곧 거리 시위에 참여하다 항쟁 막바지인 5월 26일에는 소총을 들고 "비상 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치며 민주화운동 대열의 앞에 섰다.

소요, 계엄법 및 총포화약류단속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허씨는 1980년 10월 전교사 계엄보통 군법회의(군사법원)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약 200일간 옥고를 치르다 1981년 3월 사면돼 풀려났다.

 
 5.18 당시 소총을 들고 민주화운동 시위에 나섰던 고인에 대해 군사법원은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결과적으로 정의에 어긋난 오판이었다. 판결문 등 서류에는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 5.18 당시 광주유혈진압에 앞장선 소준열 광주전남북계엄분소장의 이름이 보인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2006년 그는 광주지역 한 라디오 방송에 등장한다. 광주MBC의 <사라진 자들의 외침>이라는 라디오 다큐멘터리다.

당시 다큐멘터리 연출진은 "5·18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했지만, 우리들 관심 밖의 사람들, 넝마주이가 있다. 5․18 관련 자료 어디에서도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흔적도 없다. 당시 도청을 끝까지 사수했던 시민군이자 넝마주이였던 허○○씨를 통해 5·18을 조명하고, 전국의 넝마주이들을 강제로 한 곳에 모아 부역을 시키며 관리했던 광주 운암동의 자활근로대를 찾아가 인권 유린의 잘못된 역사를 되짚어본다"고 소개했다.

정수만 전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장은 "고인께서 항쟁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했는지 여부는 명확치 않다"면서도 "분명한 건 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하며 전두환 계엄군의 만행에 저항했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황일봉 5·18부상자회장은 "고인께서 왜 5월 단체에 가입도 하시지 않고 평생을 쓸쓸하게 지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5·18을 겪으면서 불운했던 삶이 더 불운해진 것은 아닐까"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가족분께서 빈소를 찾아주신다면 그 뜻을 최대한 존중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겠다"고 말했다.

쓸쓸한 죽음... "이제 편히 쉬셨으면" 

광주시 서구 양동주민센터 김선영 주무관은 "가끔 동네 앞을 산책하시는 모습을 봤다. 주민센터에도 가끔 다녀가셨지만 5·18유공자였다는 사실은 이번에 알았다. 그냥 혼자 다니시고 조용하신 분으로 기억한다"며 "이제는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인은 어버이날인 8일 오후 광주시 서구 양동 자신의 월세방에서 숨진 채 이웃에 발견됐다. 서구청의 노인돌봄사업에 참여한 이웃 노인은 이날 전화를 4차례나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자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그의 방에선 며칠 전 지어둔 것으로 보이는 밥이 보였고, 방바닥에는 고인이 쓰러지면서 쏟아진 것으로 보이는 설탕가루가 있었다고 한다.

허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서 생계보조비와 광주시에서 주는 월 10만원 가량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지원금으로 생계를 유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년 가족과 인연이 끊긴 무연고자로 당초 조사됐으나, 경찰과 5월 단체 수소문 끝에 일부 가족과 연락이 닿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허씨가 지병으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으나, 사인을 명확히 하기 위해 오는 10일 부검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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