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어맞고 외면받는 노동조합이 잠깐 생각해 볼 것 [소셜 코리아]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이병훈]
5월 1일 노동절을 맞은 노동계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노동절의 역사적 기원은 "하루 8시간 일하고, 8시간 쉬고, 남은 8시간은 하고픈 생활을 보장받자"는 취지로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비롯된다. 1886년 5월 1일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해 미국노동연맹(AFL)이 선언한 총파업에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지지 시위에 동참했다. 시카고 지역에서는 노동자와 경찰의 유혈 충돌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헤이마켓광장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사무엘 곰퍼스 미국노동연맹 위원장이 제안한 '보편적 8시간 노동제 쟁취'의 국제연대투쟁을 받아들인 제2 인터내셔널은 1890년 5월 1일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집회·시위를 전개토록 하여 크나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해부터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역사적인 파업과 그 희생자들을 기리는 메이데이가 일하는 사람들의 권익 개선을 위한 세계 노동자 연대의 날로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의 노동절은 주 52시간 상한제를 풀어 60시간 넘게 일 시키겠다는 등의 친기업적 노동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를 성토하는 노동계의 성난 아우성이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노동개악 저지와 민생 파탄 규탄'을 내세우며 각각 전국노동자대회와 5.1 총궐기를 개최했다. 근로시간 단축의 노동자 투쟁을 기념하는 메이데이와 장시간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허용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은 불편한 이질감을 안겨주면서 심각한 노정 격돌을 예감케 한다.
우리나라 노동 현실의 구조적 문제들을 생각해볼 때, 노동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라는 점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추진해온 노동개혁은 그 추진 방향과 진행 방식에서 엄중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윤석열표 노동개혁의 첫 번째 문제점은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 편향성이다. 보수 정권이라 친기업 국정기조를 예상하긴 했지만, 노동개혁의 주된 내용이 지나치게 기업들의 민원 해결에만 치우쳐 있다. 국정과제와 고용노동부 업무보고 그리고 전문가 중심의 자문기구 정책권고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노동개혁의 주요 추진과제는 노동시간 상한제 해제를 통한 근무 체계 유연화, 업종별 최저임금 차등화, 자율규제 중심의 노동안전 감독, 파견근로 대상 확대, 노조 부당행위 처벌, 대체근로 허용 등이 있다.
▲ 1886년 노동자와 경찰의 유혈충돌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시카고 헤이마켓광장 사건 |
ⓒ 셔터스톡 |
이들 개혁과제는 여소야대 국면에서 아직 제도 개편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경영계가 그동안 줄곧 주장해온 요구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또한, 주 52시간에 더해 1주 12시간 연장근로를 허용하는 특별 연장근로 인가를 남발하거나 중대산업재해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등 기업 봐주기식 행정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산재사망·노동시간·임금격차·노동생산성 등 주요 노동지표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의 후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영업사원을 자처하는 대통령이 친기업적 노동개혁에 대한 확고한 추진 의지를 과시하고 있다. 그래서 장시간 노동의 일 중독 사회, 산재공화국, 노동인권 사각지대, 불안정 노동의 덫, 노동시장·노사관계 이중구조 등으로 집약되는 후진적 노동 현실이 이 정부 집권 기간 뒷걸음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윤석열 정부 노동개혁의 또 다른 문제점은 노동 배제와 사회적 대화 외면의 일방적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노동개혁이 추진되어 온 방식을 살펴보면, 미래노동시장연구회, 중대재해처벌법 개선 전문가 T/F, 상생임금위원회 등과 같이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기구를 설치·활용하여 개혁과제 권고안을 제시토록 하고, 그 권고를 활용하여 정부 차원의 개혁방안을 마련해 공표하는 수순을 보여주고 있다. 전문가 중심의 노동개혁 자문기구들이 결국 정부의 입맛에 맞춘 '답정너'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신 어린 의혹이 제기되곤 한다.
반면, 윤석열 정부는 노동개혁의 추진 과정에서 노동계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과의 사회적 대화 또는 정책협의를 애써 외면해 오고 있다. 다만 MZ세대의 정치적 지지를 의식한 때문인지 유독 MZ노조들에 대해서만 소통과 의견수렴의 대상으로 공들이고 있다는 점이 현 정부의 또 다른 편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일방적 추진방식은 노동개혁의 이해당사자인 양 노총의 거센 저항을 비롯해 야당과 노동사회 진보 진영의 반발을 폭넓게 촉발하여 순조로운 개혁 진척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에 더하여, 올해 안에 노동개혁 완수를 공언하고 있는 고용노동부의 대통령 업무보고나 주 69시간 허용 등 노동시간 유연화를 둘러싸고 대통령과 고용노동부가 보여준 엇박자의 국정 난맥 해프닝은 참으로 엉뚱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듯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어설픈 노동개혁이 첨예한 노정 대립과 심각한 사회갈등을 유발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과 민생고를 총체적 난국으로 몰아가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만 하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11월 말에 발생한 화물연대의 2차 파업 직후부터 '노조 개혁'을 노동개혁의 또 다른 의제로 부각하고 있다. 당시 초유의 업무개시명령을 행사했던 정부의 강경 대응은 화물연대의 파업 철회를 끌어냈을 뿐 아니라,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을 크게 높이는 정치적 성과를 안겨주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화물연대의 파업 기간 전후(2022년 11월 3주차∼12월 3주차)로 대통령 지지율이 7∼8%P(리얼미터 33.4% → 41.1%, 한국갤럽 29% → 36%) 가파르게 상승했는데, 긍정 평가 이유에 대해 '노조 대응'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 같은 국민 여론의 분위기를 의식하듯 정부는 올 연초부터 노사 법치주의 확립을 강조하며 노조를 타깃으로 삼는 정책을 추진해 오고 있다. 그 핵심 정책과제는 노조 회계 투명성 제고, 노사 부조리 온라인 신고센터 운영, 건설 현장 불법행위와 불공정한 단체협약 시정 등이다. 또한, 윤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특히 정부 지지율에 비상이 걸릴 때마다 "귀족노조, 불법-부패 범죄집단, 혈세 낭비, 건폭, 고용세습" 등과 같은 노조 때리기 발언을 앞장서 쏟아내고 있다.
▲ 윤석열 대통령이 4월 2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복지·노동 현장 종사자 초청 오찬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 통신 사진기자단] |
ⓒ 연합뉴스 |
대통령의 반노조 발언에 화답하여 보수언론과 경제신문들은 노조 혐오 담론을 증폭시키는 확성기 역할을 적극 수행해 오고 있다. 뉴스 빅데이터 분석 서비스인 빅카인즈(BIG Kinds)에서 기사 검색을 해보면 지난해 4월 중순 이후 1년 동안 조·중·동과 매경·한경·머니투데이 등 6개 언론이 반노조 고발기사를 매일 1건 이상 다뤄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윤 정부가 노조 공격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배경에는 최근 확산되는 반노조 국민 여론이 자리 잡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행정연구원이 2013년부터 매년 실시해 온 사회통합 실태조사는 노조를 포함한 주요 기관들에 대해 국민의 신뢰수준을 묻고 있는데, 이 조사에 따르면 노동조합이 2019∼2021년 기간에 대기업·정부·시민단체와 비교하여 국민의 신뢰가 뚜렷하게 추락하여 최근에는 가장 불신받는 기관으로 평가되고 있다.
▲ 주요기관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단위 : %) |
ⓒ 한국행정연구원 |
2023년 2월에 노회찬재단과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전국 만 18∼69세의 성인 2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불평등 사회 국민 인식' 조사에서는 반노조 정서에 대해 한층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응답자의 79.8%가 노조의 필요성에 대해 찬성하면서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 대해서는 86%의 응답자가 비호감의 부정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노조 조합원들의 대다수(71.9∼74.3%)가 양 노총에 대해 비호감 의견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 역시 특기할 만하다.
또한 51.4%의 응답자가 "현재 노동조합이 노조 간부 및 일부 근로자 이익을 위해서만 활동한다"고 평가하고 있는 대목도 노동조합에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조를 전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 아니라 일부 기득권 집단을 위한 이익단체로 생각하는 국민이 많을수록 반노조 여론은 손쉽게 스며들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계는 반노조 국민 정서가 확대된 것을 주로 노조 악마화 프레임을 증폭시켜온 정부 여당과 보수언론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하지만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국민 여론을 외부 담론 공세 때문이라 치부하기에는 그 공세의 빌미가 되는 노조운동 내부의 고질적 문제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기업별 단체교섭 관행이 지배하는 노사관계 여건 하에서 노조의 교섭 성과는 전체 노동자의 14.2%에 해당되는 조합원들에게만 주어질 뿐이다. 주로 비정규직 또는 중소 사업장 소속인 85.8%의 비조합원 노동자들은 단체협약 등의 노조 보호와 무관한 노동 현실에 놓여 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에는 크게 공감하더라도 현행 노조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리 긍정적인 태도를 갖기 어렵다.
▲ 민주노총 주최 ‘노동개악 저지! 윤석열 심판! 제133주년 세계노동절대회’가 1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에서 열렸다. |
ⓒ 권우성 |
결국, 노조 내부자(조합원)의 밥그릇을 지키거나 키우는 데에만 노력하는 실리주의 노조 활동에 대해서는 국민 여론이 차가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민사회 입장에서는 조합원들이 지역주민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들이 환경·빈곤·안전 등과 같은 지역사회 이슈의 해결에 아랑곳하지 않는 '꽉 닫힌'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얄밉고, 사업장 울타리 안에만 머무는 그들과 동지적 연대감을 만들어 갈 생각을 포기한다.
또한, 노조운동을 이끌어가는 간부들이 정파 조직 논리 또는 자리 감투 경쟁에 매달리는 경우 민주적인 원칙을 대신하여 과두제적 조직 운영이 자리잡게 되어 비리와 전횡의 심각한 문제에 빠져들곤 한다. 타성적인 투쟁방식에 의존하는 '빵 파업'과 정책 요구를 남발하는 '뻥 주장'을 되풀이하는 양 노총의 모습에서 국민들은 당면한 노동 이슈의 실효적 해결을 이뤄내려 하기보다 구태의연함과 무책임함을 답습하고 있는 노조운동에 대해 어떠한 감동과 매력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노동조합 운동이 국민의 신뢰와 공감 그리고 지지를 얻어야 역주행의 윤석열표 노동개악을 막을 수 있다. 국민들의 신뢰를 되찾아 드높이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운동의 진정한 성찰과 과감한 혁신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 이병훈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소셜 코리아 고문) |
ⓒ 이병훈 |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재)공공상생연대기금 이사장으로 <소셜 코리아>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 경사노위 공공기관위원회, 플랫폼노동 사회적 대화포럼 등의 위원장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Sociology Compass'의 Work Organizations & Economics Section Editor를 맡고 있으며, 최근 연구 주제는 불안정 노동과 노동 역사입니다. 저서로 <아, 전태일!>, <노동자 연대>, <사장님도 아니야, 노동자도 아니야>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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