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속 장소 이야기㉙] 루스벨트 양의 대한제국 방문

데스크 2023. 5. 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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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양의 대한제국 방문 삽화 (출처 : Le Petit Parisien No.870, 1905년 10월 8일)

1905년 9월 서울에서는 대규모 미국 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한 영접 준비에 최선을 다하였다. 심지어 황제가 사용하는 특별 열차까지 준비하였고, 서울의 주요 거리를 정비하였다. 이와 함께 미국 사절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주요 문에는 대한제국 국기와 미국 국기를 함께 게양하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테디라는 애칭을 붙여준 워싱턴 포스트의 삽화 (출처 : ’Drawing the line in Mississippi’, Washington Post, 1902. 11. 16)

앨리스 루스벨트가 대한제국을 방문한 것은 미국 외교 사절단의 아시아 순방에 동행한 결과였다. 본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테디 베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외교 사절단을 아시아에 파견하였다. 얼마 전까지 필리핀 총독으로 있다가 육군 장관에 취임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비롯하여 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23명 등으로 구성된 외교 사절단에는 그들의 보좌관뿐만 아니라 부인까지 동행하였다. 앨리스 루스벨트 역시 사절단에 동행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앨리스 루스벨트는 국비 유람 여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본인의 호주머니에서 나간 것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실상은 여행 경비조차 전적으로 개인 부담이었다.


일본 방문 당시 스모경기를 관람하는 앨리스와 이토 히로부미 (출처 : Smithsonian Institution)

앨리스 루스벨트는 공식적인 외교 사절단은 아니었지만,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로 매우 극진한 접대를 받을 수 있었다. 서태후를 비롯해 일왕과 접견과 식사를 했고, 저녁에는 해당 국가에서 주최하는 연회에 귀빈으로 초대받았다. 이때 엘리스는 언론과 대중의 시선 중심에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대통령의 딸로서 사교계에 데뷔 당시에 입고 등장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른바 ‘앨리스 블루 가운’처럼 흑백 모니터의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깔을 입혀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칠흑 같은 바다 위에 떠 있는 하얀 빙하에 햇빛이 반사되어 만들어 낸 ‘앨리스 블루’ 그대로였다.


햇빛에서 앨리스 블루 착색을 나타내는 유빙 (출처 : 위키디피아)

당시 고종은 미국 외교 사절단 특히 미 대통령의 영애인 앨리스 루스벨트를 사실상 국빈처럼 대우하였다. 고종과 앨리스 루스벨트의 접견 자리에는 황태자를 비롯하여 대한제국의 주요 인사가 자리하였다. 고종은 식사 후에 과거 조선이 중국 사신을 맞이했을 때처럼 식사 때 사용한 식기 등을 고스란히 앨리스 루스벨트에게 선물하였다.


홍릉에서 코끼리 석수에 올라탄 앨리스 루스벨트 (출처 : Cornell University Library)

앨리스 루스벨트는 대한제국에 머물면서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을 방문하였다. 여기서 앨리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진을 찍었다. 홍릉을 둘러보던 중에 무덤 주위에 세워놓은 석수에 관심을 가졌고, 그중에 코끼리 석수에 올라탄 것이다. 여기에 동행하였던 롱워스 하원의원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것이다. 앨리스 루스벨트의 돌발 행동은 익히 잘 알려진 것이었고, 바로 음식이 나오면서 일행과 환담이 이어지면서 이 일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대한제국 측 인사들은 앨리스의 행동에 분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을 비롯하여 대한제국 황실은 앨리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결례에도 불구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문제는 앨리스 루스벨트는 공식적인 외교 사절단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모든 협상이 그렇지만, 일방만의 기대와 요청만으로는 협상 자체가 성사될 수 없었다. 특히 그 협상 결과가 자국의 안전과 보호일 경우에는 더욱더 성사되기 어렵다. 고종이 고대하던 거중조정을 단지 미국의 선량한 처사에 호소하기에 당시 미국이 바라던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또한 일본 역시 러일전쟁 중에 지불한 비용이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포츠머스 회담 결과 배상금 없이 강화 협상이 타결되자 앨리스 루스벨트 일행에 대한 일본인의 극진한 접대는 바로 돌팔매질로 바뀌었을 정도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사람들의 관심이 앨리스에게 집중된 사이에 양국의 협상 책임자였던 미국의 태프트와 일본의 가쓰라는 외교 협상을 진행하였다. 이때 협상 테이블에 올라온 것은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과 아시아 진출을 보장하고, 대신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는 것을 묵인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하나의 장기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국제 관계에서 현실적 이해관계가 갖고 있는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종은 이러한 본질보다 극진한 접대와 호소를 통해 원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을사늑약에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외교권의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통한 보호국화였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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