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외교가 정쟁화될 때

구채은 2023. 5. 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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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건 쉽죠. 옳은 건 복잡해요. 문제는 '쉬운 선명함'이 늘 '복잡한 옳음'을 이긴다는 겁니다."

정치학자 버나드 마넹은 대의민주주의는 '선출된 집단의 현명함', '대중의 견해를 정제하고 확대해 공공선에 부합하는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설명했다.

과연 선출직 공직자들은 탁월한 시민들로 구성됐을까? 현재의 정치 상황을 보면 '복잡한 옳음'보다 '선명한 쉬움'으로 논리 구조가 세뇌된 사람들로 채워진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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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외교, 제로섬·이분법 존재안해
쉬운 선명함이 복잡한 옳음을 이기는 정치
고차방정식 외교의 본질 훼손

“선명한 건 쉽죠. 옳은 건 복잡해요. 문제는 ‘쉬운 선명함’이 늘 ‘복잡한 옳음’을 이긴다는 겁니다.”

한 야당 국회의원에게 들은 말이다. 한국정치의 단면을 또렷히 보여주는 표현으로 기억한다. 양당제에선 ‘쉽고, 선명한 논리’로 상대 진영의 급소를 강타하는 전술을 종종 쓴다. 이는 프레임 잡기가 편하다. 승리하는데도 유리하다. 유권자 뇌리에 꽂히고, 반대편을 수세에 몰기 쉽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일관계에서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곧바로 친일(親日)이나 매국(賣國)으로 거칠게 연결짓는 것이다. 식민지배 피해국들이 공유하는 반일감정과 민족주의는 역사교육과 역사드라마 등 여러 콘텐츠를 통해 우리 뇌 속에 자리잡은 집단 무의식이다. 정치가 뾰족하게 각을 세워 이를 자극하는 것이다.

실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 “셔틀 외교가 아니라 빵셔틀 외교”라고 혹평했다. 이 대표는 또 ‘저자세 외교’, ‘굴욕·사대 외교’ 등의 표현을 썼다. 대안제시는 없었다. 일본을 배제와 섬멸, 타도의 대상이자 ‘공공의 적(敵)’으로 간주한 전형적인 정치공세다.

야당에서 주장하는 강경론을 극단으로 밀어부쳐보자. 식민지배의 책임을 끝까지 물어 단죄하는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해 끝장 대결을 펼친다. 한일청구권협정의 제3조에 따른 분쟁조정위원회를 연다. 한일관계는 급랭한다. 화이트리스트에서 빠진다. 경제교류는 얼어붙는다. 안보위협은 커진다. 북·중·러 연합을 대응할 지렛대를 잃게 된다. 승산도 불투명하다.

현실세계가 굴러가는 방식은 복잡계에 가깝다. 양자 외교에서 ‘제로섬’이나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이 만날 때 마다 사죄하면 속시원할 것이다. 하지만 한일관계는 간단하지 않다. 인과응보 원리가 통하지 않는다. 통상 국익은 강대강으로 부딪히는 경우가 잦다. 양국은 자국내 여론, 외치와 내치까지 고려해 치열하게 협상한다. 일본은 강제징용 배상해법으로 우리에게 빚을 졌다. 우리는 G8 진입을 위해 일본과 친선이 중요하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국제정치에서 ‘깨끗한 승리’는 존재하기 어렵다.

정치학자 버나드 마넹은 대의민주주의는 ‘선출된 집단의 현명함’, ‘대중의 견해를 정제하고 확대해 공공선에 부합하는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설명했다. 과연 선출직 공직자들은 탁월한 시민들로 구성됐을까? 현재의 정치 상황을 보면 ‘복잡한 옳음’보다 ‘선명한 쉬움’으로 논리 구조가 세뇌된 사람들로 채워진 것은 아닌가. 이 것이 여론이 되면, 촘촘해야할 공론장의 찬반 논증이 단선화된다. 다차방정식으로 풀어야 할 외교의 본질이 훼손된다.

외교는 특수성이 있다. 국민 모두가 당사자이자 이해관계자다.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결코 합치될 수 없는 극단의 상황’으로 정쟁화하는 것은 도움이 안된다. 두달도 안돼 이뤄진 답방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장기적 시계로 봐야 한다. 일본의 과거사 인식 변화, 사과를 받아내는 절차도 마찬가지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줘야 한다’는 일득일실(一得一失)의 단계를 부단히 거쳐서 정교하고 치밀하게 스텝바이스텝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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