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주권'이 아닌 성 평등한 '시간주권'을 위하여

이소진 2023. 5. 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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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동자, 돌봄 노동에서 장시간 노동까지

[이소진]

 3월 4일 제38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는 한국여성노동자회 회원들.
ⓒ 한국여성노동자회
 
시간주권은 일반적으로 노동시간을 포함한 삶의 시간을 노동자가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시간주권이라는 용어 사용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간주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달성 불가능한 기획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에게 시간주권이 주어질 수 있는 것처럼, 주어져야 하는 것처럼 의미를 호도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스스로) 판매하면서 시간에 대한 권리 또한 일부 양도했다. 노동력을 판다는 것은 일정 시간의 노동을 판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기로 한 이상 노동시간에 대한 통제권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협상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노동자에게 주어질 수 있는 종류의 권리가 아니다. (그리고 이미 모두가 알고 있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로소득이 존재하지 않는 한 '노동하지 않는 삶'을 택할 수는 없다.) 또한,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권력의 위계관계에서 이 협상은 당연히 불평등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만, 노동자는 노동계약을 맺지 않거나 파기함으로써 사실상 협상 장소를 떠날 수 있기에 이러한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특히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으로, 결과는 개인의 책임으로, 스스로 위험을 계산하고 관리하라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계약은 철저히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으로 의미화된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제도가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러온 것은 정부 개편안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새로운 제도는 현행 제도의 혜택조차 받지 못하던 노동자들의 존재를 비가시화한다. 마치 모든 사람이 주 52시간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왜곡하면서 이미 (원치 않는) 장시간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워버린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나는 작년 5월부터 10월까지 한국여성민우회와 함께 프리드리히-에버트재단의 후원을 받아 여성 노동자들의 시간주권에 관한 연구를 시행한 바 있다. 해당 연구를 통해서 나는 20대부터 40대 사이 여성 노동자들(사무직, 돌봄/서비스직, 생산직)을 만나 노동 현장과 노동시간에 관한 경험을 수집했다(이 연구는 <한국여성학> 38권 4호에 실려 있다).

연구 결과, 생산직과 같이 노동시간에 따른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경우에는 노동 현장에서 시간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이 확대되곤 했다. 내가 이미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에서 썼듯 연장 노동은 예고 없이 이루어졌으며 거부하기도 어려웠다. 분명 표준 노동시간은 하루 8시간, 한 주 40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들에게 매주의 노동시간은 52시간을 의미하는 경우가 잦았다.

노동시간에 따른 급여를 산정 받을 수 없는 경우, 즉 포괄임금제 적용을 받아 연장 노동수당을 포함한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아니, 어쩌면 더 최악이었다. 노동시간을 계산할 필요가 없으니 주 52시간이라는 규제는 무용지물이었으며, 수당도 지급되지 않았다. 게다가 컴퓨터가 있으면 어디서나 일할 수 있다는 사무직의 특성은 언제 어디서나 노동자에게 업무를 지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어떤 노동자는 새벽같이 전화를 받기도 했다. 회사와 집 사이의 거리, 소위 '직주거리'는 오히려 덫이 되고 있었다. 가깝다는 이유로 수시로 호출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조사한 거의 모든 노동자에게 '일찍 퇴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추가노동에 따른 수당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한국에서 시간에 따른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일이 많을 때 노동자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추가노동을 수행해야 하지만, 일이 없을 때 노동자들은 퇴근하지 못한다. 정해진 노동시간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대부분 노동자는 휴가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나 홀로 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부 여성은 회사 내에서 말 그대로 '혼자' 업무를 진행했다. 이러한 '나 홀로 업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회사에서 숙련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특정 업무에 노동자 한 명만을 배치한 경우이다. 이 경우 노동자들은 말 그대로 혼자서 업무를 처리하기 때문에 휴가를 쓰기 어려워진다. 둘째, 혼자 일하지는 않지만, 혼자서 전 과정의 업무를 맡는 경우다. 예를 들면, 편집자나 물류 사무 업무, 영업직 등이 해당했다.

'나 홀로 업무'를 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회사에서 눈치를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기간 휴가를 사용하기 어려워진다. 이들에게 장기간 휴가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공백 기간 업무가 밀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휴가 복귀 후 밀린 업무를 혼자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어떤 노동자는 휴가 기간 내내 집에서 재택근무를 수행했고, 어떤 노동자는 장기간 휴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노동자는 휴가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며 매일 매일의 야근이 줄어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들에게 주 69시간 노동제, 즉 누구의 말에 따르면 일할 때 빡세게 일하고 쉴 때 제대로 쉬는 이 노동시간 제도는 '빡세게 일하되 쉬지는 못하는' 제도가 될 확률이 농후하다. 나 홀로 업무를 진행하는 노동자에게는 내 일을 맡아 대신 처리해줄 동료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장시간 노동을 미리 수행했다 하더라도, 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미 일부 사업장은 연차사용촉진제도에 따라 연차를 사용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차를 수당으로 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사 측 간의 협의가 진행될 수 있을 리 없다. 이것이 바로 69시간 노동제가 (누구나 예상했지만 정부만 예상하지 못한) 청년들의 반발을 불러온 배경이다.

여성이 시간주권을 보장받으려면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시간주권 개념을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이미 눈치챈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 글에서 '시간주권'이라는 용어를 암묵적으로 '노동시간주권'의 의미로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시간주권'은 기실 '노동시간주권'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사적 영역에서의 시간주권은 당연히 개인에게 귀속되어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노동 현장에서의 시간주권 협상 정도에 따라, 사적인 생활 역시 영향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개인 시간에 대해서만큼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사적인 영역, 즉 가족이나 내 개인적 생활의 영역에서 시간주권은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가? 주어져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 사적 영역의 시간주권은 허용되지 않는가?

사실 어떤 여성들에게, 특히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에게 시간주권은 주어진 적이 없었다. 임금을 지불받지 못하는 돌봄 노동은 여타의 다른 노동과 달리 24시간 노동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시간에 대한 통제권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의 특성상 주어질 수 없다. (주어지면 큰일 난다.) 한밤중에 강아지가 껌을 잘못 삼켜 목에 걸렸다면 바로 강아지를 들쳐 매고 병원에 가야만 하는 것이지 지금은 잠을 자야 할 때라는 이유로 응급한 생명의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다. 배가 고파 한밤중에 우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제발 부모에게 시간에 대한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다.

자, 그렇다면 시간주권을 '노동시간주권'이 아니라, 노동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영역에서 시간주권 문제로 바라본다면 69시간제 문제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69시간 노동제는 돌봄 노동을 수행할 필요가 없는 노동자를 이상적 노동자로 간주하고 있다. 애초에 (아이 돌봄을 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가 한주에 69시간 노동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돌봄 노동을 구매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여성들은 갑작스럽게 퇴근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어디다 맡겨야 할지 동동거려야 한다.

장시간 노동 덕분에 갑자기 짧아진 노동시간도 소용없긴 마찬가지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을 그렇게 들쭉날쭉 내가 원하는 시간만 고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양질의 돌봄을 위해서는 길어진 노동시간에 맞추어 상품을 구매해야 할 것이고, 짧아진 노동시간에도 여전히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물론, 상품을 구매할 수 없는 노동자들도 있다. 이들은 (돌봄 상품을 구매할 수 없으므로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삶이 조금 팍팍해질 것이다.

따라서 시간주권을 노동시간에 한정하여 의미를 제한적으로 사용할 경우 개인시간에 있어서 시간주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많은 여성 노동자의 삶이 은폐된다. 이 여성들에게까지 시간주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노동시간 제도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돌봄 노동의 평등한 분배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해왔듯 이를 위해서는 노동시간 단축이 필수적이다. 노동시간 길이가 짧아져야 (자본가에 양도된) 우리의 시간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 장시간 노동에 시간주권은 없다. 그것이 노동의 영역이든, 개인의 영역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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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이소진 연세대학교 박사과정,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저자가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5,6월호 '특집' 꼭지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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