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빠진 소송…국군포로 승소했지만, 배상금은 '첩첩산중'
"이유없는 재판 거부"…반쪽짜리 승소 판결
햇수로 4년만에 승소, 남은 쟁점은 추심금
6·25전쟁 때 북한으로 끌려갔다가 탈북한 국군포로들이 북한 당국을 상대로 낸 강제노역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실제로 배상금을 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재판 지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판결을 두 달여 앞두고 피고 명단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까지 뺐지만, 불완전한 승리가 된 셈이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212단독 심학식 판사는 전날 국군포로 김성태씨(91) 등 3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대표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고는 김씨와 유영복씨, 숨진 이규일씨 유족 등 원고 측에 각 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국군포로 김성태씨는 판결 직후 "오늘같이 기쁘고 뜻깊은 날을 위해 조국에 돌아왔지만, 부모님과 형제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만나보지 못했다"며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다 죽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남은 쟁점은 '추심금'…경문협, 北 공탁금 지급 거부다만 그동안의 사례를 볼 때 북한으로부터 손해배상금을 받아내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앞서 서울중앙지법은 2020년 7월 국군포로 한재복씨 등 2명이 2020년 7월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 판결을 내린 뒤, 북측이 항고하지 않아 판결을 최종 확정했다.
당시 법원은 북한의 저작권을 위임받은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이사장 임종석)이 북한에 지급할 저작권료를 법원에 공탁 중인 만큼배상금을 대신 지급하라고 추심 명령을 내렸지만, 경문협에서 이를 거부했다. 북한 당국이 아닌 조선중앙TV 등 매체에 지급할 돈이라는 이유에서다.
경문협은 당시 추심 명령이 부당하다고 서울동부지법에 항고했고 재판부는 경문협의 손을 들어줬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지만, 한씨는 올해 2월 향년 89세로 눈을 감았다. 법원에 공탁된 북한 저작권료는 23억원 이상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2008년 박왕자씨 피살사건 이후 남북 금융거래가 중단되면서 쌓이기 시작했다. 당초 공탁금은 10년 내 회수하지 않으면 국고로 귀속되지만, 경문협은 공탁금 소멸 시효가 도래한 2019년부터 매년 공탁금을 회수·재공탁하는 방식으로 국고 귀속을 막고 있다.
이번에 승소한 국군포로들은 추가 소송을 통해 경문협을 상대로 배상금을 받아낸다는 방침이다. 정수한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장은 "국군포로 어르신들께선 배상금이 목적이 아니라 북한에 의해 긴 시간 불법적으로 감금되고 노역을 했던 것에 대해 죄를 묻고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셨던 것인데, 늦게나마 그 바람이 이뤄져서 다행"이라며 "경문협과의 항소심에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피고 김정은' 빠진 손배소…재판 지연 탓 반쪽 승리당초 이번 소송은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 판결 당시 피고는 '북한 당국'뿐이었다. 국군포로 측 법률대리인 구충서 변호사는 아시아경제와의 통화에서 "앞선 1차 소송 땐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권력의 세습으로 인해 국군포로들의 강제노역에 대한 책임 또한 상속됐다는 논리로 접근했다"며 "그러나 재판이 장기간 지연되는 상황에서 실익이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고, 고심 끝에 2월 말 김정은에 대한 소를 일부 취하했다"고 밝혔다.
실제 재판부는 30개월에 걸쳐 아무런 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다. 상대가 북한인 만큼 공시송달 등 절차에 시일이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법원에서 공시송달 처분이 내려진 것은 올해 2월22일이었다. 공시송달은 소송 서류를 전달할 수 없을 때 법원이 게시판 등에 내용을 게재한 뒤 전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이다.
소송 제기 후 공시송달 절차가 이뤄지기까지 국군포로 5명 중 이원삼·유영복·이규일씨 등 청구인 3명이 숨졌고, 이원삼·유영복씨 측은 소를 포기했다. 이때까지 국군포로 측은 법원에 북한과 김정은을 상대로 공시송달 처분을 내려달라는 요청을 세 차례, 재판기일을 잡아달라고 다섯 차례에 걸쳐 신청했지만, 법원에선 별도 답변이나 재판 지연 사유를 밝히지 않았다.
3명의 판사가 아무런 절차를 진행하지 않은 채 교체됐고 네 번째로 사건을 맡은 판사가 전날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구충서 변호사는 "국군포로 5명은 김정은 집권 전인 2000~2001년 사이 연이어 탈북했다"며 "뒤늦게 공시송달이 시작됐는데 재판에서 '(김일성·김정일이 아닌) 김정은의 책임을 입증하라'거나 추가적으로 재판이 지연될 경우의 수를 우려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소송의 계기가 된 1차 소송에선 재판부가 북한과 김정은의 책임 모두를 인정했지만, 김씨 등이 낸 2차 소송에선 김정은의 책임이 빠진 것이다. 북한과 김정은의 불법을 규탄하는 상징적 승리마저 반쪽이 된 셈이다. 서울중앙지법에서 부장판사를 지낸 구 변호사는 "법원에서 20여 년 근무했지만, 이런 재판은 처음 봤다"며 "재판 지연이 아닌 재판 거부"라고 주장했다.
장희준 기자 jun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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