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임관동기가 쌓은 성산 외성은 왜 사라졌나 [수산봉수 제주살이]

이봉수 2023. 5. 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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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봉수 제주살이] 제주에서 '평화'는 가장 간절한 소망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기자말>

[이봉수 기자]

교민들이 제주에 오는 또 다른 이유
 
▲ 성산일출  8일 새벽 5시 40분, 키아오라리조트 뒤 오름인 대수산봉에서 찍은 성산 일출 풍경. 대수산봉이 일출봉을 찍는 데는 최적지인 듯하다. 왼쪽으로 우도 쇠머리봉이 보이고 아래쪽은 일반인에게 일출을 보는 장소로 알려진 광치기해변이다.
ⓒ 이봉수
     
"너무 속상해요. 1년 전만 해도 BTS와 블랙핑크, 아카데미상을 탄 한국영화, 엘지와 삼성 가전제품, 현대·기아차 등으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죠. 이젠 한국이 미·중·러·일 강대국 사이에 낀 '글로벌 호구' 같아요."

키아오라리조트 투숙객 중에는 멀리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브라질 같은 데서 오는 교민이 더러 있다. 그들 중에는 내가 글을 쓰는 <오마이뉴스>나 시민언론 <민들레> 독자, 또는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친구(페친)도 있다.

특히 '페친' 사이는 참 묘해서 상대방 게시물을 열심히 읽다 보면 오랜 친구보다 더 마음이 통할 때가 많다. SNS 시대에는 지연·학연이나 업무상 알게 된 지인보다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강한 연대감이 생긴다.

지난해 가을 캐나다 토론토에서 온 문성주씨와 딸은 '페친의 페친'이었는데 키아오라리조트로 와서 4박5일간 바비큐도 함께하며 많은 얘기를 했다. 그들 모녀는 그래도 아쉬웠는지 인천공항에서 토론토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산 육포를 보내왔는데 캐나다든 제주든 다시 만나길 희망했다.

페이스북 글만으론 너무 답답한 시국담

미국에서 인력수급사업을 크게 하는 '페친'(필명 Jake Deschain)인 줄리언 정은 페이스북 글에 서로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다가 그것만으로 소통하기에는 시국이 너무 갑갑하다며 제주 방문 뜻을 밝혔다.

마침 필리핀 출장 길에 키아오라리조트에 들러 첫 대면을 하고 5박6일간 우리 사회와 한미 현안에 관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이주해 사업상 50여개 나라를 드나들고 있지만 제주는 첫 방문이라 했다.

나도 제주도민이 된 지 1년 반밖에 안 돼 제주학을 열심히 배우는 수준이지만 대수산봉과 비자림 등 인근 명승지를 함께 걷고, 세화5일장에서 키아오라에 이르는 절경의 해안도로를 주행하며 제주의 자연·역사·민속에 관해서도 많은 얘기를 했다.

실은 [이야기의 보고, 제주]라는 제목으로 분야별 PPT를 계속 만드는 중이어서 제주를 좀 더 흥미롭게 설명할 수 있었다. 나는 전남 화순·보성에 볼일이 있어 이틀간은 그가 혼자 다녔는데 성산일출봉 등정은 중도에 포기했다고 한다. 시차 적응이 안 된 상태에서 사업성격상 한밤중에 세계 각지와 연락해야 하는 이에게 성산은 만만치 않은 오름이다.

'저질체력'이라며 놀리다가 성산에 얽힌 역사,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과 세계지질공원에 둘 다 등재된 이유를 설명해주자 그는 다음에 다시 와서 성산에 꼭 오르겠다고 별렀다.

제주1경 보러 '오밤중 등산' 한 이형상 목사
 
▲ 성산일출 보기  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중 ‘성산관일’. 성산일출봉 가파른 암벽에 당시에도 계단이 파져 있고 목사 일행은 정상에서 일출을 관람하고 있다. 왼쪽 아래 누운 소처럼 보이는 섬은 우도.
ⓒ 제주목관아
     
'물 건너 고을'이라는 뜻의 제주(濟州)는 '바다고을'이라는 뜻으로 영주(瀛州)라고도 불렸는데, 영주10경 중에서도 제1경은 '성산일출'이었다. 제주를 샅샅이 순력해 탐라순력도를 남긴 목사 이형상은 화공에게 성산관일(城山觀日) 도를 그리게 하고 '바깥 면 4면의 벽은 대패로 깎은 듯, 거울을 갈라놓은 듯, 크게 우뚝 솟아서 새와 짐승도 통한 자취가 없다'고 묘사했다.

그들 일행은 오경에 정상에 올랐다는데 이는 새벽 3~5시에 해당하니 수발 드는 사람들 고생이야 오죽했을까? 사실 일출은 바다 말고는 보이는 게 없는 정상보다는 일출봉을 배경으로 솟는 해가 훨씬 더 아름답다. 광치기해변이 일출 명소로 꼽히는데 나는 키아오라리조트 바로 뒤 오름인 대수산봉이 최적 입지라고 생각한다. 사진가나 화가들이 멋진 일출 장면을 잡으려고 새벽부터 대기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는 것도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성산(城山)은 말 그대로 성처럼 생긴 산이어서 오를 때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처럼 가파르지만 산마루에 올라서면 6만5천평(21만4400㎡)에 가까운 접시 모양 분화구가 눈 아래 펼쳐진다. 분화구 둘레에는 고만고만한 99개 암석 봉우리가 솟아 있어 거대한 석성을 방불케 한다.

'천혜의 요새'에 스스로 가둔 이경록 목사

임진왜란 때인 1597년 제주목사 이경록은 성산을 "하늘이 베푼 요새"라며 3읍의 군기와 창고를 이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 목사는 성산 밖에 외성(外城)을 쌓다가 죽고 이듬해 부임한 목사 성윤문은 성산진을 철수해 수산진으로 복귀한다. 이때 외성을 쌓다 말았기 때문에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1601년 반란 음모사건을 위무하려고 제주에 온 안무어사 청음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이경록의 계책을 '최하'(最下)라고 평가했다. 그는 "(성산에) 만인을 들일 만하되 흠은 우물이 없는 것"이라며 "만약 본주(本州)를 버리고 성산에 들어와서 수비한다면 이것은 적을 피하고 스스로 수인(囚人)이 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 일출봉 분화구 성산은 북서쪽 사면이 사주로 연결된 것 말고는 원래 바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천혜의 요새다. 김상헌은 우물이 없다 했지만 분화구 서쪽 바위 틈에는 ‘생제’라는 작은 샘이 있다.
ⓒ 제주관광공사
군비강화보다는 교역증진이 평화 기여

성을 쌓으려는 마음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은 내는 자 흥한다'는 말도 있지만, 중국 만리장성이든 우리 천리장성이든 영국 하드리아누스 장벽이든 길고 긴 성도 방어에 도움된 적은 거의 없다. 오늘날 남북한과 주변 강대국들이 교훈을 얻는다면 군비강화보다는 교역증진이 평화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경록은 폄하해서는 안 될 인물이다. 임진왜란으로 8도가 유린될 때 제주도는 유일하게 전란에 휩싸이지 않고 후방기지 구실을 했는데 당시 제주목사가 이경록이었다. 수령의 임기는 5년이 원칙이었는데 힘든 제주목사는 2년 반이었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는 286명이었고 평균 재임기간은 1년 10개월에 불과했는데 이경록은 무려 6년 5개월간 재임했다.

그는 1576년 식년시 무과에 병과 3위, 곧 전체 11등으로 급제했는데, 바로 아래 12위가 이순신이었다. 둘은 '임관 동기'로서 이경록이 경흥부사, 이순신이 조산만호였을 때 여진족이 녹둔도를 공격해 백성 160여 명을 납치해 간 사건이 터졌다. 상관인 북병사 이일의 책임이 컸으나 둘은 죄를 뒤집어쓰고 백의종군하라는 처벌을 받았다.

동병상련이었을 둘은 편지 교환도 자주 했고 임진왜란 때는 제주목사 이경록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군수물자도 지원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제주목사 이경록이 소 다섯 마리와 양식을 보내와 부하들을 잘 먹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선조가 제주 군사의 육지 파견을 거부한 이유

<선조실록>에는 이경록이 "군사 2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힘을 합쳐 전진하여 토벌하고자 하여 조정의 하명을 청합니다"라고 장계를 올리자 비변사가 임금에게 불가하다고 품의하는 대목이 있다.

"탄환 같은 조그만 섬이 현재까지 다행히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아직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일 적이 침범한다면 일개 섬의 힘만으로 잘 지킬 수 있을까 걱정되는데 어떻게 주장(主將)으로서 진(鎭)을 떠나 바다를 건너 멀리 천리길을 올 수 있겠습니까?"

전세가 다급한 판국에 얼핏 생각하면 불합리한 이 의견을 선조가 따른 것은 제주마저 전쟁터가 되면 안 된다는 판단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대륙이나 반도 주변의 섬들은 육지에 군대를 파견해 전쟁에 끼어들거나 군사기지를 제공했다가 전쟁의 참화를 당한 사례가 너무나 많다.

오키나와 참사가 재연될 뻔한 제주도

'무방비 도서'였던 울릉도를 예로 들면 동해에서 해전을 벌인 러일전쟁 때는 물론이고 한국전쟁 때도 국군이든 인민군이든 상륙한 적이 없다. 전쟁이 끝나면 어차피 본토의 운명을 따르게 돼 있어 군대를 주둔시키면 그만큼 전력손실이 오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가 함락되자 제주도를 최후의 저항기지로 삼고 결7호작전을 계획했다. 이 작전계획에 따라 제주도 방어를 위해 관동군으로 악명 높은 제121사단까지 끌어들여 45년 8월에는 7만명 규모 58군을 편성했다.

이때 옥쇄작전을 위해 제주 해안과 산악지대에 구축한 동굴진지가 지금도 700여 개나 남아있다. 해안에 설치한 특공기지는 송악산, 일출봉, 서우봉, 수월봉, 삼매봉 5곳인데, 가이텐(回天)으로 유명한 자살특공대용 어뢰정과 잠수정 등을 숨겨놓았다.
 
▲ 일본군 일출봉 동굴진지 (위 사진) 일출봉 남서쪽 해안인 수마포 동굴진지 모형도. 이곳에만도 18개 동굴진지가 구축됐는데 왕(王)자형으로 연결된 곳도 보인다.
ⓒ 이봉수
   
 (아래 사진) 동굴 입구.
ⓒ 이봉수
                             
오키나와 희생자 20만 중에는 민간인이 12만을 넘었는데, 제주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제주도민은 어찌 됐을까? 원자폭탄 투하로 전쟁이 일찍 끝났지만 더 끌었더라면 제주도민이 대신 희생될 뻔한 상황이었다.

활주로 늘려놓고 미국 전폭기가 이·착륙한다면

제주는 지금 제2공항 찬·반 깃발이 도로 곳곳에 나부끼고 있다. 항공기 지연발착이 일상이 되다시피 한 제주공항을 확장하든 제2공항을 건설하든 공항 확충은 시급한 현안인데, 제2공항 군사기지화설은 합리적 결정을 가로막는 또 하나 변수다. 지역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중국을 겨냥한 미군 전략폭격기가 이·착륙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정부에서는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찍이 삼별초군과 여몽연합군의 전쟁터가 됐던 제주, 백년 간 말을 기르던 몽고인이 결혼 등으로 제주민과 결연한 뒤 원나라를 패망시킨 명나라의 말 징발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잔인하게 진압해 '간과 뇌가 땅을 가렸던' 제주, 일본군의 동굴진지 구축과 비행장 건설에 민간인이 강제동원된 제주, 3만에 이르는 4.3학살의 땅 제주에서 '평화'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다. 섬 밖 외세에 늘 무참히 짓밟혔던 '평화의 섬'은 언제쯤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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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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