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법 없이 표류 중인 ‘유산유도제’…도입 논쟁 언제까지
지난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한국에서 낙태죄에 대한 처벌 조항 효력은 사라졌지만,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 사이에서는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제한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적지 않은 여성이 임신중지를 위해 온라인에서 암거래되는,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유산유도제에 기대는 실정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명확한 해법 없이 관련 법안이 국회에 표류 중인 가운데 여성·시민사회단체와 약사들은 지속해서 유산유도제 국내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산부인과 전문의와 일부 여성단체에서는 태아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보호할 수 있는 법과 임신중지에 관한 법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유산유도제 허가 여부를 논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산유도제 필수의약품 지정 위해 정부·국회 나서야”
전 세계에서 쓰이는 대표적인 유산유도제는 영국 제약사 라인파마가 개발한 미페프리스톤 성분의 ‘미프진’이다. 미페프리스톤은 합성스테로이드 성분으로 항호르몬을 차단해 자궁 내 착상된 수정체를 분리시킨다.
국내 유산유도제 도입 노력은 계속 있어왔다. 현대약품은 2021년 7월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 복합제제인 ‘미프지미소정’에 대한 허가 신청을 접수했으나 지난해 12월 16일 신청을 자진 철회했다. 식약처가 현대약품 측에 안전성, 유효성, 품질 등에 대한 일부 자료 보완을 요청했는데, 현대약품은 해당 자료를 기한 내 제출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품목허가 신청을 스스로 취하했다.
유산유도제 도입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약사들은 식약처에 유산유도제 국내 도입을 촉구하는 민원을 제출했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건약)는 지난 4일 ‘172명의 약사들은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하기 위해 유산유도제의 필수의약품 지정 및 신속 도입을 요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통해 여성들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정부와 국회가 나설 것을 촉구했다.
건약은 “임신중지를 원하는 많은 여성이 의약품을 이용해 임신중지를 시도하고 있고 이로 인해 포털사이트나 SNS에서 유산유도제를 판다는 광고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면서 “온라인 구매가는 실제 비용보다 비싸며, 복용 방법과 약물의 출처를 알기 어려워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여성단체를 포함한 시민사회는 유산유도제의 신속 도입과 필수의약품 지정을 수차례 요구했지만 식약처는 관련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며 “약물을 통한 임신중지는 비용 부담을 줄이고, 물리적 접근성도 개선할 수 있으며 수용성도 높아 많은 국가의 여성들이 선호하는 방법이다”라고 전했다.
건약은 또 “세계보건기구(WHO)는 여성의 건강을 보장하기 위해 임신중지를 필수보건의료서비스 목록에 포함하고 있으며, 유산유도제를 각 국가들이 보장해야 할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하고 있다”라고 짚었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약부터 도입하나”
유산유도제를 도입하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법이 없다’는 한계도 있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국회와 정부는 후속 입법에 나섰지만 논의에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 조항을 다룬 ‘형법 개정안’(6건)과 임신중지 허용범위 삭제 등이 담긴 ‘모자보건법’(8건)이 우후죽순 발의됐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묶인 지 3년이 다 돼간다.
전혜성 바른인권여성연합 사무총장은 지난 8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임신중절약 도입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온라인에서 불법 거래되고 있는 임신중절약에 대한 허가 여부는 일부 효력을 상실한 형법상 낙태죄와 그에 따른 모자보건법의 개정에 달려 있다”고 잘라 말했다. 법률적 정비가 선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전 사무총장은 “국회가 처벌 효력이 사라진 낙태죄를 뒷받침할 입법 의무를 외면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이 전무한 상태”라고도 했다.
그는 “관련 법률에 대한 국회와 정부의 입법 의지를 볼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임신중절약의 허가를 논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은 아니지 의문이다”라며 “자유로워진 성문화로 인해 늘어가는 무분별한 낙태 문제는 여성 인권과 건강권, 나아가 사회공동체에 끼치는 영향력을 고려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임신중절약의 도입은 단순히 하나의 의약품을 승인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낙태 체계를 도입하는 문제”라면서 “국가는 여성 인권과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무분별한 낙태를 방조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산부인과 전문의들도 입법 없이 유산유도제를 도입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선을 그었다. 김동석 전 직선제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은 “헌재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대체 입법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정부와 국회의 직무유기”라며 “낙태죄에 대한 입법이 안 된 상태에서 유산유도제를 도입하는 것은 불가하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약부터 도입한다는 말이냐”고 반문했다. 아울러 “국민의 생명권에 직결된 법을 방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합리적이고 타당한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프진이 안전하다는 약사·여성·시민단체의 주장에 관해서는 “절대로 안전한 약이 아니다. 반드시 초기 임신에 사용해야 하고, 자궁에 착상이 돼 있는지 산부인과 전문의 진단 뒤 사용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자궁외임신인데 사용하면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자궁외임신은 수정란이 정상적인 위치인 자궁 몸통의 내강에 자리 잡지 않고 난관, 난소, 복강, 자궁경부 등에 착상되는 임신을 말한다.
김 전 회장은 “미프진 복용 후 과다출혈, 불완전 유산, 패혈증 등 여러 위험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며 “미프진은 산부인과 의사의 관리 하에서 처방이 이뤄져야하고, 수술 전후 초음파 진단이 필수적이며, 의약품 예외코드로 지정해 병원에서 직접 투약이 가능하도록 해야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임신중절약 암거래를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도 했다. 김 전 회장은 “온라인에서 구입하는 임신중절약 중에 가짜약이 있을 수 있고 불필요하게 약을 복용하는 경우도 있다”며 “태아에게 중대한 선천적 결함이 생길 수 있고 약을 복용하고 부작용으로 산부인과를 찾는 경우도 많은 만큼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적극적으로 암거래를 막아야 한다”고 피력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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