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싸도 저탄소 철강 씁니다"…'그린 경쟁' 新바람 분다

코펜하겐(덴마크)=권다희 기자 2023. 5. 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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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의 경제학]①유럽 기업들이 비싼 저탄소 제품을 쓰는 이유
[편집자주] 지난달 23~24일 유럽 풍력협회 윈드유럽·덴마크 스테이트오브그린·그린파워덴마크가 주최해 덴마크에서 열린 프레스 투어 및 같은 달 25~27일 코펜하겐에서 열린 윈드유럽 콘퍼런스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한국에 함의를 줄 수 있는 내용들을 추렸습니다. 유럽에서는 에너지 안보 제고라는 정치적 동력·에너지 전환으로 산업 활로를 찾겠다는 경제적 동력이 맞물려 강력한 변화가 일어나는 중입니다. 올해 이 곳의 최대 화두는 풍력발전 확대를 위한 '공급망'을 어떻게 구축하느냐였고, 이 공급망 구축을 지배하는 의제가 '지속가능성'이었습니다. 추상적 구호가 아닌 시장에 의해 가속화하는 지속가능성입니다. 이 공급망에 속한 한국 기업들도 직면하게 될 흐름의 일부인만큼, 이 곳에서 가장 활발히 논의된 내용들을 소개합니다.

타워 이미지/출처=지멘스가메사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업계의 성장, 기업의 수익 창출 능력, 지속가능성이 모두 함께 갑니다. 지속가능성은 그저 보기 좋아 보이려고 하는 어떤 게 아닙니다."

세계 최대 풍력 터빈 제조업체 중 한 곳인 지멘스가메사리뉴어블에너지(SGRE)의 얀 크리스티안센 해상풍력 제품 포트폴리오 관리 대표가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유럽 풍력협회 윈드유럽 주관 프레스투어의 한 발표에서 남긴 이 말은 기업에게 '지속가능성'이 더 이상 추상적 구호가 아님을 드러낸다.

저탄소 타워 수요 생기자 공급↑…글로벌 업체 첫 주문 체결

유럽 풍력업계에서 재생에너지를 늘려 기후변화에 대응하자는 건 과거의 의제다. 현재는 풍력발전 산업 전과정 자체를 '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영위하자'는 논의로 넘어왔다. 이 논의는 구체적 제품 상용화로 구현된 단계다.

최근 지멘스가메사가 제조 과정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인 '그리너 타워(GreenerTower)'를 출시해 이 타워를 세계 최대 해상풍력 개발업체 중 한 곳인 독일 RWE에 판매한 게 대표적 예다. RWE는 덴마크 북부에 짓는 1기가와트(GW) 규모 '토르' 해상풍력단지에 2026년 세울 터빈 72개 중 36개를 지멘스가메사의 이 '그리너 타워'로 설치한다고 지난달 21일 밝혔다. 개발사가 '저탄소 타워' 제품을 대규모로 주문한 최초의 사례다.

풍력발전기 터빈의 기둥인 타워를 만들 때 터빈 전 제조 과정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3분의 1이 나온다. 지멘스가메사에 따르면 그리너 타워는 만드는 과정에서 기존 타워 대비 63% 더 적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지멘스가메사는 "만약 1년간 우리가 설치한 모든 타워를 이 타워로 교체하면 유럽 도로에서 1년 동안 46만6000대 이상의 자동차를 없애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멘가메사가 '그리너 타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적은 철강 제품을 써야 한다. 현재 기술로 이산화탄소 배출이 전혀 없는 철강 생산은 불가능하다. 대신 재생에너지로 가동한 전기로를 이용하고, 철광석 대신 고철을 써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인 '저탄소 철강'은 출시 돼 있다. 풍력산업 공급망의 가장 윗단에 있는 개발사가 저탄소 제품에 대한 수요를 갖게 되면서, 터빈사도 저탄소 타워를 만들게 되고, 저탄소 타워를 만들기 위한 저탄소 철강에 대한 수요가 생기자 철강회사도 저탄소 철강을 만들게 되는 구조다.


유럽, 해상풍력단지 입찰에 '정성평가'↑…공급망 타고 '저탄소 제품' 수요↑

물론 저탄소 철강은 기존 철강 대비 더 비싸다. 저탄소 철강으로 만든 타워도 더 비싸다. 하지만 더 비싼 가격에도 RWE처럼 이를 사려는 수요가 있다. RWE에 터빈을 공급하는 터빈 업체도 개발사의 수요가 있으니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저탄소 철강을 쓴 타워를 만들고 싶어한다. 오히려 사고 싶어도 없어서 못사는 상황이라고 한다. 지멘스가메사 관계자는 머니투데이에 "지금은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저탄소 철강 공급이 제한적이어서 살 수 없는 게 문제"라며 "터빈사 뿐아니라 자동차 회사들도 저탄소 철강을 사려고 해 공급 보다 수요가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더 비싼 저탄소 제품을 사려는 걸까. 중요한 배경 중 하나는 유럽 정부들이 풍력단지 입찰에서 비(非)가격기준 비중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가가 정한 입지에서 해상풍력 입찰을 실시한다. 응찰한 개발업체가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더 낮은 가격' 외 '비가격기준'이라는 정성 평가에서도 높은 점수를 얻어야 한다. 비가격기준은 국가마다 다르지만 해상풍력단지를 지을 때 얼마나 생물다양성을 신경썼느냐, 온실가스 배출을 줄인 중간재를 썼느냐, 지역사회에 얼만큼의 혜택을 줬느냐 등이 될 수 있다.

유럽연합(EU)은 정부가 보조금을 제공하는 해상풍력 입찰에 최대 30%의 비가격기준 배점을 둘 수 있게 했는데, 보조금이 없는 일부 국가 입찰은 더 강력한 비가격기준을 요구한다. 지난해 말 자국 해상풍력 단지 입찰 시 무려 90%의 배점을 비가격요인에 둔 네덜란드가 대표적 예다. 폴린 블롬 네덜란드 경제기후정책부 해상풍력 담당 수석 정책관은 같은 달 26일 윈드유럽 한 컨퍼런스에서 "풍력이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공급망에서 기업들의 책임있는 행동을 위해 적절한 방식으로 집중할 것"이라며 비가격기준을 더 강화할 것임을 시사했다. 프랑스 정부도 지난해 노르망디 연안의 1GW 해상풍력발전 단지 입찰에서 25%의 비가격기준 배점을 뒀고, 독일·벨기에 등도 비가격기준 비중을 늘리는 추세다.

즉 개발업체가 해상풍력 프로젝트 입찰에 성공하려면 비가격요인에서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게임의 법칙'이 만들어진 것이다. 개발업체 입장에선 어느 수준까지는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저탄소 타워나 재활용가능한 블레이드를 쓰는 게 입찰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이득이 된다. '제도의 변화→변화한 제도에서 '승자'가 되기 위한 공급망 상위 기업의 변화→공급망 전체의 연쇄적인 변화'라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 외스터릴(Østerild) 풍력터빈 시험 시설에서 지멘스가메사리뉴어블에너지(SGRE)의 얀 크리스티안센 해상풍력 제품 포트폴리오 관리 대표가 윈드유럽 프레스 투어에 참가한 기자들에게 발표를 하고 있다/사진=권다희 기자
자동차·가전제품·조선사도 저탄소 철강 관심 높아져

핵심은 이 변화가 공급망을 타고 모든 공급망의 단계에서 변화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오스테드, RWE 등 전세계에서 가장 큰 해상풍력 개발업체들이 입찰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저탄소 제품 주문을 늘리면, 지멘스가메사나 베스타스 같은 대형 터빈 제조업체도 개발업체들이 필요로 하는 '저탄소 터빈' 생산을 확대하게 된다. 저탄소 터빈을 만들려면 터빈 제조업체는 이를 만드는데 필요한 중간재와 원료 기업에 저탄소 공정을 요구하게 된다. 타워, 케이블, 하부구조물, 철강 등 한국 기업들이 만드는 제품군에도 직결되는 문제다. 크리스티안센 대표는 "최종 제품이 나오기까지의 전체 밸류체인과 과정이 중요하다"며 "지멘스가메사가 전체 프로세스를 통제할 수는 없지만 공급업체에 대한 요구 사항은 통제할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이는 풍력 산업에 국한한 추세가 아니다. 풍력 산업계의 변화가 유럽 정부의 제도 변화로 가속화했다면, 자동차·가전제품 등 소비재 업체는 마케팅 및 타사와의 '그린 경쟁'을 위해 자체적으로 저탄소 중간재 사용을 늘리고 있다. 독일 철강사 잘츠기터의 산드리나 시버딩벡 전략 및 비즈니스 개발 이사는 같은 달 25일 윈드유럽 한 콘퍼런스 세션에서 "잘츠기터가 2026년 공급할 수 있는 그린스틸을 이미 마케팅하고 있다"며 "지난해 자동차 기업이 다량의 구매 예약을 했다"고 전했다.

저탄소 철강 '엑스캅(Xcarb)'을 출시한 유럽 최대 철강사 아르셀로미탈 관계자도 윈드유럽 박람회장에서 머니투데이와 만나 "업종별로는 자동차 기업들이 그린스틸에 관심이 매우 높다"며 "가전제품 기업들 역시 관심이 상당히 높고, 조선업체와 재생에너지 기업들도 관심이 크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은 관심이 유럽 기업들에 더 집중돼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며 "이런 경향이 강화될 것"이라 했다.

저탄소 철강에 대한 관심이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제한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철강은 매우 에너지 집약적인 산업이라 업스트림 생산을 완전히 탈탄소화하기까진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는 "이런 투자는 단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앞으로 몇년에 걸쳐 투자가 완료되기 전까지는 그린스틸을 공급할 수 있는 양이 제한될 것"이라며 "그러나 투자의 진행 및 수요의 증가에 맞춰 그린스틸 생산도 더 큰 단계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 했다.

코펜하겐(덴마크)=권다희 기자 dawn2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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