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간호법 사태, 국민 눈높이에서 풀어가야
진퇴양난에 빠져… 의료 현장
대혼란 막아야 하지만 민심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
국민 생명 볼모로 한 의료계
파업은 용납될 수 없어… 대선
당시 간호법 제정을 약속한
여권도 거부권 명분 없어
난국 타개는 갈등 조정 능력에
달려… 각 직역들 의견 충분히
듣고 중재안 마련해 야당과
재협상하는 정치력 발휘하길
간호법 사태를 둘러싸고 여권이 딜레마에 빠졌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처했다.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간호법 제정안은 지난 4일 정부로 이송됐다. 그대로 법률로 공포할지 아니면 국회의 재의를 요구할지는 이송 이후 15일 안에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선택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야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처음 행사했던 것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의료 현장의 대혼란도 막아야 하지만 진정 국민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보건의료 직역 간 대립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간호법 저지에 나선 의사, 간호조무사 등의 단체들은 거부권 카드를 꺼내지 않을 경우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여권을 압박하고 있다. 이에 맞서 대한간호사협회도 거부권 행사 시 실력행사에 나설 것을 시사함에 따라 예측 불허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국민 생명과 건강을 볼모로 한 집단행동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유념하고 어느 직역이든 파업만은 자제해야 한다.
의료계와 정치권은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일단 양측 대치를 촉발한 간호법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부터 들여다보자. 제1장(총칙)∼제6장(보칙)으로 구성된 간호법 내용을 보면 양측이 무엇 때문에 싸움을 하고 있는지 의아하게 만든다.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업무, 간호사 면허와 간호조무사 자격 인정 등은 모두 의료법 조항을 옮겨온 것에 불과하다. 새 내용은 이들의 권리 및 처우 개선을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책무를 선언적으로 규정해놓은 것뿐이라서 논란이 될 게 없다.
타 직역에서 문제삼는 건 제1조(목적)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부분의 ‘지역사회’라는 문구 하나다. 이게 왜 논란이 되는지는 국민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렵다. 인구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의료기관 바깥의 고령인구 및 만성질환자에 대한 간호 돌봄 서비스가 중요해진 건 사실 아닌가. 그런데 의사집단은 간호사들의 ‘단독 개원’으로 이어져 의료 영역을 침범당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억지다. 간호사는 의사 지도하에 진료 보조만 할 수 있다고 법에 못박아놓아 단독 개원은 불가능하다. 간호사 업무 영역의 확장으로 일자리를 잠식할 수 있다는 간호조무사, 응급구조사 등의 의구심은 그래도 이해할 만하다. 일말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시행령 등을 통해 구체적 업무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면 될 일이다.
간호조무사들은 ‘학력 제한(고졸)’ 자격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도 원래 의료법에 있던 조항이다. 보건복지부도 차별적 조항이라며 거드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왜 의료법 손질에 나서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다. 중재 역할을 해야 할 정부가 한쪽에 편향된 시각으로 갈등을 조장해온 것부터 자성할 일이다. 개정이 꼭 필요하다면 간호조무사계의 이견부터 정리한 뒤 정치권을 설득하는 절차를 밟으면 된다. 이런 이유만으로 간호법을 저지하자는 건 설득력이 약하다.
간호법 제정은 간호사들의 숙원 과제다. 국민 입장에서도 의료법이 최신 보건의료 환경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초고령사회에 대비한 지역사회 돌봄 체계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물론 여러 의료인들의 협업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여야는 지난 대선 때 정책 협약 또는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후보 시절 간호법 제정을 약속했다. 최근 대통령실이 공약이 아니었다며 오리발을 내밀고 있으나 구차한 변명일 뿐이다. 대한간호협회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지난해 1월 간담회에서 윤 대통령 등이 발언한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을까. 대선 공약을 총정리한 ‘윤석열 공약위키’에 실린 간호 개선 방안의 1번도 ‘의료계의 공정과 상식을 지키기 위한 간호법 제정 추진’이다. 국정을 책임져야 할 여권의 비굴한 모습이 민망할 따름이다.
거부권은 명분이 없다. 간호법은 국민의 70% 이상이 찬성한다(2022년 국회 보건복지위 여론조사). 게다가 국민의힘 의원 2명이 대표 발의했고 소속 의원 46명도 발의에 동참한 바 있다. 여권이 난국을 돌파하려면 정치력으로 풀어야 한다. 각 직역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미봉책이 아닌 합리적 중재안을 마련한 뒤 야당과 협상해 새로운 법안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다. 다만 중재안의 기준은 직역 이기주의가 아니라 국민 눈높이가 돼야 한다. 이 모두 여권의 갈등 조정 능력에 달렸다.
박정태 수석논설위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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