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우의 시시각각]대통령, 이제는 이재명을 만날 때다
국내 정치는 '독주' 이미지에 갇혀
'피의자도 만날 수 있다'며 나서야
반일 감정 활용은 좌파 정권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그즈음 MB는 공개 석상에서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면 일제강점기 때 저질렀던 악행과 만행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대일 강경 기조는 박근혜 정부에서 더 심화됐다. 2013년 취임 첫해 3·1절 기념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죽창가’ 같은 노골적인 반일몰이는 아니라 해도 ‘친일=우파’ 프레임을 탈피하기 위해 우파 정권도 때론 날 선 메시지를 동원했다.
그런 탓일까. 윤석열 대통령의 대일 기조는 낯설 정도다. 휘발성이 강한 강제징용 이슈를 ‘제3자 변제안’을 꺼내 밀어붙인 건 국내 정치로 치환하면 독수(毒手)에 가깝다. 일본을 향한 우호적 제스처가 본인 지지율을 갉아먹을 것임을 윤 대통령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관계 회복에 나선 건 ‘한·미·일 대 북·중·러’로 축약되는, 동아시아 체제 전쟁에서 이탈할 수 없다는 엄중한 정세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동시에 민주당 출신 김진표 국회의장의 “큰 결단”이라는 평가처럼 배짱 두둑한 윤 대통령의 성향도 한몫했다.
확실히 최근 윤 대통령의 외교 행보는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거린다. 단지 즉석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부르고, 꽤 유려한 영어 연설을 하고, 늦은 밤까지 외국 정상들과 술자리를 가져서가 아니다. 여태 우리는 피해자, 약소국이란 틀에 스스로 갇히곤 했다. 윤 대통령에게선 그런 자격지심이나 머뭇거림이 없다. 미·일 양국에 끌려가느니 죽든 살든 내가 이 판을 직접 끌고 가겠다는 주도성도 역력히 감지된다. 그런 덕인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7일 강제징용과 관련해 "혹독한 환경에서 고통, 마음 아프다"고 했다.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한 한국 시찰단 파견에도 동의했으며, 히로시마 한국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도 참배하기로 했다. 50여 일 전 도쿄 정상회담에 비해 진일보한 태도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윤 대통령은 나라 밖에선 선 굵은 행보와 통 큰 양보로 변화를 유인한 것과 달리 국내 정치의 실타래는 좀체 풀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과의 대치는 논외로 쳐도 이준석-나경원-안철수 등 여권 내 유력 주자는 잇따라 ‘팽’당하며, 친윤 그룹은 어느새 친위 부대로 전락한 모양새다. 최근 불쑥 튀어나온 야당 원내대표와의 회동 제안도 어설픈 꼼수다. 이를 통해 강경파-온건파 갈라치기에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다면 노회한 민주당을 한참 모르는 것이다. 이미 민주당은 원내대표 회동 카드를 슬슬 굴려가며 ‘이재명 양보, 박광온 겸양’ 모드로 써먹고 있다.
당대표 사법리스크와 돈봉투 살포 등 야권에 악재가 끊이지 않음에도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탄력이 붙지 못하는 건 고착화된 ‘독주’ 이미지 탓이 크다. 이를 떨쳐내기 위해선 파격적인 행보로 물길을 한방에 돌려야 한다. 민주당이 그토록 목매는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회동도 고려할 수 있다. 아니 파렴치한 범죄 피의자를 어떻게 만나냐고? 필요하면 지옥문이라도 두드려야 하는 게 지도자 아닌가. 게다가 무죄 추정의 원칙은 헌법 조문이다. 이 대표를 만나면 검찰에 잘못된 사인을 줄 거라고? 검찰이 권력의 눈치만 본다는 얘기인가. 정치는 정치고, 수사는 수사다.
윤 대통령으로선 이 대표와 마주 앉는 게 끔찍하게 싫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국면은 그리 녹록지 않다. 각종 여론조사가 이를 말하고 있다. 당장 직역 간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간호법 처리를 위해서도 야당 협조가 필요하다. 윤 대통령은 한·일 관계와 관련해 "과거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고 해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다. 범죄 혐의가 여전히 상존한다고 해서 야당 대표와 정치적인 해법을 모색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이젠 벗어날 때다.
최민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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