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1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3김의 유산을 다시 생각한다
2023년에 요청되는 ‘새로운 정치’
3김 시대 40년, 같고도 다른 길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61년 강원도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의회가 해신되면서 국회의원 당선증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하다가 40대 기수론 바람이 불 때 김영삼을 제치고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어 1971년 대선에서 바람을 일으키면서 일약 야당의 스타 정치인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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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정치의 얼굴 YS·DJ·JP
스타일 달랐지만 공통점도 있어
반대편도 껴안는‘대화’놓지 않아
‘젊은피’ 적극 수혈하며 난국 돌파
젊은 세대 외면하는 오늘날 여야
정치경험 없는 ‘셀럽’이 대안인가
」
김종필은 1962년 민주공화당을 창당했고, 1970년대 유신체제 아래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명실상부한 박정희 정부의 2인자였다. 1980년 신군부가 유신 지우기 작업을 하면서 수모를 당하기도 했지만, 민주화 이후 충청권의 맹주로서 영향력을 높여가다가 1990년 3당 합당으로 화려하게 부활했고,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다시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김종필은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박정희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제도권의 김영삼, 재야의 김대중
3김은 196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 정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들의 정치적 여정은 사뭇 달랐다. 김영삼은 어린 나이에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1990년 3당 합당 이전까지 줄곧 야당에서 활동하면서 독재 타도와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선명 야당을 이끌었다. 독재정부 아래에서 정권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야당의 ‘사꾸라’가 판치는 상황에서 독재에 대한 정면 투쟁을 이끌어왔다.
반독재투쟁을 위한 선명 야당의 지도자였음에도 김영삼은 황태자였다. 김영삼은 항상 제도권 정당 안에서 움직였으며, 당내 지도자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야당 총재에 올랐다.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 가택연금을 경험했지만, 1985년 2·12 총선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야당의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반면 김대중은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 했다. 유신 선포 직후인 1973년 도쿄에 머물던 김대중은 시내 한복판의 호텔에서 납치되었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으며,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동해에 수장될 뻔했다. 이후 가택연금 상태에서 제도권 정치에 속하지 않은 재야의 지식인들과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에는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미국의 도움으로 사면된 후 1985년까지 미국에서 생활해야 했다.
김종필은 35살에 쿠데타를 주모한 후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책임자가 되었다. 김종필은 민주공화당을 창당했지만, 그의 정치 여정은 꽃길만은 아니었다. 미국과의 갈등 속에서 두 차례 해외로 쫓겨나야 했고, 그 사이 민주공화당에는 김종필 반대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후계자가 될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박정희의 3선개헌으로 대통령 출마 길이 막히자, 그의 지지자들은 끝까지 저항한 반면,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은 채 유신체제가 종식될 때까지 2인자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김영삼의 추진력, 결단의 정치
이렇게 3김의 정치적 여정은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세 사람의 정치 스타일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김영삼은 기회를 포착하면 이를 밀어붙이는 타입이었다. 60대 이상이 판치는 상황에서 40대 기수론을 대세로 만들었고, 1970년대에는 구정치인들을 몰아세우면서 야당 총재에 당선되었다.
그는 사꾸라와 각목 전당대회를 정면으로 돌파했으며, 1979년에는 김일성과의 대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독재정권을 지원하면 한국이 ‘제2의 이란’이 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가 총재직 박탈과 국회에서의 제명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10·26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김영삼은 1980년대 23일간의 단식투쟁에 이어 민주산악회를 이끌면서 6·10 민주항쟁을 주도했고, 1990년에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 3당 합당 과정에서 약속이 있었다고 알려진 내각책임제 개헌을 막기 위해 마산에 내려가 칩거하면서 결국 개헌을 무산시켰다. 결정적 순간마다 김영삼의 돌파력은 빛을 발했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김대중계 인물을 통일부 장관에 임명했다.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등 파격적 정책을 추진했다.
신중한 김대중, 공작정치 희생양
김대중은 매우 신중한 스타일이었다. 이는 어쩌면 그의 인생 역정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었다. 독재정부 시절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탄압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공작정치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어떤 비밀도 정보당국에 하나둘씩 흘러나갔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을 하든지 신중하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위기를 급격하게 돌파하거나 어려운 국면을 극적으로 전환하기보다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스타일의 정치인이었다.
반면 김종필은 정치 스타일에서 한 차례 큰 전환을 겪었다. 1969년 이전의 김종필에게서는 김영삼의 향기가 났지만, 그 이후에는 김대중과 유사한 정치 스타일을 보였다. 5·16 군사정변 직후의 김종필은 불도저였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도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밀어붙였다. 한·일협정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의 스타일이 변한 것은 3선 개헌이었다. 이후 김종필의 행보는 항상 조심스러웠다. 이러한 조심성이 역설적으로 1980년 서울의 봄을 돌파하지 못하고 신군부가 들어서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됐을 가능성도 있다.
3김의 교집합, ‘통치’보다 ‘정치’
이렇게 3김은 서로 다른 스타일의 정치인이었지만, 두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는 오랜 정치적 경험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반대파도 끌어안을 수 있으며, 그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었다. 생각이 다르더라도 결국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서로 화합을 하지는 못했지만, ‘통치’보다 ‘정치’를 했다. 김영삼은 박정희와 영수회담을 했으며, 민주자유당을 만들어냈고, 김대중과 김종필은 DJP 연합을 만들어냈다.
둘째로 이들은 새로운 인물들을 통해서 정치의 판을 바꾸는 법을 알았다. 김종필은 민주공화당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각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일꾼들을 찾아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싶었다. 이들은 3선개헌 때도 김종필을 끝까지 지지했던 인물들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젊은 피를 등장시켰다. 특히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인물들을 영입했다.
1996년 김영삼은 김문수·홍준표를, 김대중은 천정배·신기남·정동영을 영입했다. 2000년의 16대 총선에서는 이인영·우상호·임종석 등 386세대와 오세훈·원희룡이 의회에 진입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이지만, 보수 야당은 2004년의 17대 총선에서는 유승민·나경원·이혜훈·정두언 등이 초선 의원이 됐다.
신진 정치인들의 영입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꼼수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시대적 변화를 읽은 3김의 한 수였다. 지금은 여야의 중진이 되어 있고, 용퇴 압력을 받는 분들도 있지만, 당시 이들은 단순한 셀럽들이 아니라 현장에서 치열한 삶을 경험했던 젊은 피였다. 그렇기에 단순히 당의 노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시대 변화 읽는 청년 정치인 기대
이제 2024년 총선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 각 당은 새로운 인재 영입을 위해 또 한 번 나설 것이다. 그러나 진정 시대의 변화에 맞는, 정치 훈련을 받으면서 정치를 할 줄 아는, MZ세대와 같은 새로운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인들이 나타날 수 있을까. 정치 경험이 없는 새로운 셀럽들이 또 민심을 호도하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두 거대 정당이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 젊은 세대이면서도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발굴하지도, 훈련하지도 않고 있다. 오히려 이들을 당의 외곽으로 밀어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3김의 정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한다. 아마도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먼저 당 이름을 바꿀 생각부터 할 것 같다. 공천을 받기 위해 당대표가 직인을 갖고 도망갔던 해프닝이 또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3김이 한국 정치에 미친 부정적 영향이 적지 않았음에도 왜 이들의 향기가 그리울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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