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이정진, 묵묵히 응시하는 것의 힘
그의 사진 속 풍경은 고요하지만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거친 들판에 부는 마른 모래바람이 보는 사람의 피부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합니다. 수십 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벽, 띄엄띄엄 자리한 텅 빈 건물들, 가시 같은 질감의 풀과 나무들. 오래전 시간이 멈춘 듯한 황폐한 풍경 앞에서 관람객은 잠시 당혹스러워집니다.
지금 부산 해운대로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작가 이정진의 개인전 ‘이름 없는 길(Unnamed Road), 7월 9일까지’ 얘기입니다. 2010~2011년 작가가 이스라엘과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수차례 오가며 촬영한 사진 39점을 한자리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이 작가가 여기까지 갔을까요. 시작은 ‘디스 플레이스(This Place)’ 프로젝트였습니다. 10여 년 전 프랑스 사진작가 프레데릭 브레너는 세계적인 사진가 12인의 시선을 통해 이스라엘과 요르단강 서안 지역을 탐구하는 아트 프로젝트를 기획했습니다. 여기엔 스티븐 쇼어·토마스 스트루스·제프 월·요제프 쿠델카 등 거장 사진가들이 대거 참여했고, 이정진은 여기에 참여한 유일한 아시아 작가였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요르단강 서안 지구는 ‘중동의 화약고’라 불리는 분쟁지역입니다. 지난 수십년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으로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올해에도 동예루살렘 성지를 둘러싼 갈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작가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곳곳에 서 있는 수백 년 된 올리브 나무가 묵묵히 그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과 같이, 개인적 편견이나 판단 없이 그 땅의 느낌을 나의 은유적 언어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분쟁, 공포, 적개심 그리고 신에 대한 기도…. 이 모든 현상이 내 시야를 혼돈 속에 가두었다. 슬펐고 종종 마음의 길을 잃었다.”
그래서일까요, 묘하게도 그가 포착한 화면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팽팽한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황야에서 포착한 철조망 덩어리, 엉킨 나뭇가지 뭉치가 각자 날카로운 질감으로 ‘불편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작가가 한지에 감광 유제를 발라 인화한 뒤 이를 다시 디지털로 프린트하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는 이렇게 만들어진 독특한 질감으로 정말 많은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그 땅을 누비며 올라오던 내 불편한 감정들이 내 마음의 반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내 작품에서 각자 자신의 얼굴과 감정을 비춰보더라. 그게 늘 흥미진진하다.”
이정진의 ‘이름 없는 길’은 오랜만에 묵묵히 응시하는 것의 힘을 깨닫게 합니다. 이역만리의 길과 바위, 돌멩이와 바람이 우리에게 소리 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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