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우리 강아지 이름은 왜 김정원이 됐을까? 우리가족을 소개합니다
우리 가족을 소개합니다
임시보호를 하던 강아지 ‘징가’를 정식 입양하면서 ‘김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엄마는 한바탕 난리를 쳤다. 넌 곽 씨고 엄마는 정 씬데, 왜 정원이는 ‘김’ 씨냐는 거였다. 내 ‘최애’인 김이나 작사가와 배구 선수 김희진의 성을 따온 건데. 엄마는 가족 단톡방에서 끝내지 않고 따로 메시지를 보냈다. 정원이는 이제 엄마의 가족이기도 하니 권리를 행사하겠다며 구청에 동물등록을 할 때만이라도 성을 떼고 ‘정원’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성 없이 등록하는 건 되고 남의 성은 안 되고? 그냥 알았다고 해버리고 내가 알아서 등록했어도 엄마가 그걸 찾아볼 길은 없는데, 자꾸 성에 집착하는 엄마를 보면서 나도 물러서기가 싫었다. 처음으로 선택한 내 가족에 대해 가치관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파워 결혼주의자의 두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언니는 결혼 후 경기도에서 아들딸과 함께 4인 가족으로 산다. 나는 해방촌에서 반려견 김정원과 비혼주의자로 살면서 비혼에 대한 글을 쓰고 팟캐스트를 진행한다. 결혼 안 한 건 괜찮은데 꼭 앞으로도 안 한다고 못을 박아야겠냐, 비혼주의자면 비혼주의자지 그걸 팟캐스트까지 해야 하냐는 언덕을 넘어야 했지만, 이제는 팟캐스트 게스트로 출연 중인 엄마가 김정원의 동물등록 앞에서 다시 대치 각을 세운 것이다. 우리 가족으로 국가에 등록하는 건데, 다른 성을 쓴다고? 내 새끼한테(이미 김정원은 엄마 새끼가 됐다!) 그런 일을 겪게 해선 안 되지, 암. 가부장제에서 자란 ‘유교걸’의 마음이라 해도 사랑인 건 확실했기에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순 없었다.
결과적으로 엄마는 내가 꾸린 가족 형태를 인정해 줬다. 가족 행사에 늘 동행하는 정원이가 가끔 엄마를 바라보지 않으면 “할머니가 부르는데 왜 안 쳐다봐, 김정원!” 하고 부른다. 거기서 힘주어 부르는 김 씨 성이 엄마가 보여주는 존중이고 사랑이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
엄마는 내가 해방촌에서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처럼 지내는 것도 받아들였다. 내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비혼세’에도 자주 출연한 피우다 강혜영 대표(이하 혜영언니)는 엄마가 가장 많이 안부를 묻는 친구인데, 미국인 아내와 결혼한 기혼자 레즈비언이다. 언젠가 엄마는 북 페어에서 혜영언니를 만났는데, 손을 덥석 잡고 그러더란다. “우리 민지가 부족한 점이 많은데 잘 챙겨줘서 고마워요.” 엄마는 유교랜드에서 온 학부형답게 또 자식 흉을 보면서 인사를 했다. 혜영언니는 엄마의 첫 퀴어 지인인 셈이다. 내 팟캐스트에 출연해 2시간 동안 혜영언니 부부의 동성 결혼식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내게 처음 한 이야기는 이랬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서 카톡이 왔다. “동성 부부도 의료보험 혜택 줘야 한다고 2심에서 나왔다네. 1심 때는 기각됐대. 대법원에서도 이겨야 할 텐데, 대법원이 상고한다니 속상하네.” 이게 엄마한테서 온 게 맞나, 확인하고 무슨 소리냐 했더니 지금 KBS 뉴스에 해당 소식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남편도 없이 친구들과 의지하고 살아도 괜찮을까 걱정하던 엄마에게 혜영언니는 내 삶의 중요한 인물이 됐고, 결혼주의자인 엄마 입장에서 결혼했는데도 불평등하게 사는 혜영언니네 이야기가 남 같지 않았던 모양이다.
“혜영이 때문에 눈을 번쩍 뜨고 봤지.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돼. 우리나라도 진화할 거야.” 딸 안부는 하나도 안 묻고, 엄마는 대화를 그렇게 마무리했다. 뉴스에서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눈이 번쩍 떠지고,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으면 일희일비하고, 살면서 보지 못한 형태의 삶을 살더라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마음. 나는 엄마가 혜영언니 부부에게 품고 있는 이 마음이 엄마와 혈연으로 연결된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그것보다 더 가족답다고 느낀다. 성이 같아야만, 가치관이 같아야만 가족이 아니라는 점을 엄마가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엄마는 나를 통해 생활동반자법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내게 중요한 인물들의 존엄을 생각하면서 동성혼 법제화를 응원하는 사람이 됐다. 엄마는 정치적 문제에 관심이 없고 소수자 권리에 앞장서는 사람도 아니지만, 여전히 평생 살아온 관성대로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 굽는 엄마의 팔뚝에는 딸의 비혼주의가, 다 커서 굴러들어온 강아지 김정원이, 딸의 사실상 가족인 퀴어 부부가 알통처럼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5월, 엄연한 가족이지만 법과 사회는 가족으로 바라보지 않는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남들이 뭐라 하든 우리는 다 가족이다. 이런 가족도 가족이니 인정해 달라는 소극적 표현보다 한 번뿐인 내 삶에서 내가 꾸린 가족의 존엄을 선언하는 것으로 5월을 시작해 본다. 우리는 여기 존재하는 단단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변함없이 사랑할 테니 우리와 함께 변해주세요. 사랑은 늘 이기니까, Love Wins!
곽민지
‘해방촌 비혼세’라는 닉네임으로 조금 더 친근한 팟캐스트 ‘비혼세’ 진행자이자 방송작가. 〈걸어서 환장 속으로〉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를 썼다. 여성의 몸과 사랑, 관계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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