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굴욕외교는 이렇게 계속 이어졌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한국을 찾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 발언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7일 기시다 총리는 한일 정상회담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지난 3월 윤 대통령께서 방일하셨을 때 저는 1998년 10월에 발표된 일한 공동선언을 포함하여 역사인식과 관련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말씀드렸습니다"라며 말했다.
이 말을 통해 그는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명시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뿐 아니라 이와 상반되는 내용을 담은 2021년 4월 27일 자 스가 요시히데 내각의 역사인식 결정(강제동원은 없었다)까지 포함해 역대 내각의 입장을 종합해서 계승하겠다는 이상한 입장을 재차 표명했다. 사과인지 아닌지 모호한 발언을 한국에 와서까지 거듭 되풀이한 것이다. 그런 뒤 이렇게 말했다.
"저도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을 하게 된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서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일한 양국 간에는 수많은 역사와 경유가 있습니다마는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온 선인들의 노력을 이어받아 미래를 위해 윤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측과 협력해 나가는 것이 일본 총리로서 저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7일 자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일한수뇌회담, 전 징용공에 대해 기시다 수상 '가슴이 아프다고 생각한다'"라는 기사는 이 표현을 '코코로가이타무(心が痛む)''로 옮겨적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사인 "기시다 수상 '전 징용공 문제, 가슴이 아프다'"도 마찬가지다.
질의응답 때에 그 표현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자들을 향한 언급이냐는 물음이었다. 기시다 총리는 부정하지 않았다. "저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린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강제징용괴 관련된 언급임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이다. 다만, 총리의 의견이 아니라 개인 의견이라는 단서를 붙였을 뿐이다.
"진전된 메시지 갖고 올 수 있다"더니
지난달 29일 일본 언론에서 '기시다 총리가 5월 7일이나 8일 한국을 방문하는 방향으로 조율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됐다. 이틀 뒤인 이달 1일,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이 YTN <더뉴스>에 출연해 '기시다 총리가 식민지배·강제징용 배상문제 등과 관련해 사과를 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답변했다.
조태용 실장은 "한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일본이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국민들께서 한일관계가 정상화되니 이런 좋은 일도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도록 저희가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답변했다
조태용 실장만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정진석 국민의힘 의원도 비슷한 말을 했다. 3월 정상회담 나흘 뒤인 그달 20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그는 "기시다 총리도 머지않은 장래에 한국 방문하지 않겠느냐?"라며 "그러면 진전된 메시지를 갖고 올 수 있다"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윤 정권이 그런 전망들을 제시한 뒤, 기시다 총리가 방문해 '가슴 아프다'는 말을 던졌다. 그래서 이 말은 강제징용에 대한 유감 표명 비슷하게 들릴 수 있다.
이 말에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그런 의미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뿐 아니라 또 다른 의미도 함축한 이중적 메시지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들이 들을 때는 유감 표명이 될 수 있지만, 일본 극우세력이 들을 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슴이 아프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 인물이 있다. 지금은 상왕이 된 아키히토 일왕(천황)이 바로 그다. 그는 군국주의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할 때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강제징용 피해자 같은 군국주의 희생자들을 상대로 이 표현이 쓰일 때는 아키히토 일왕의 용법을 참고해야 한다.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을 상대로 일왕이 특정한 의미로 사용한 표현이 있다면, 총리대신이 전혀 다른 의미로 그 표현을 사용하기는 곤란하다. 더군다나, 군국주의 전쟁의 핵심 당사자는 다름 아닌 일본 왕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리가 군국주의 전쟁과 관련해 이 표현을 쓰면서 왕실의 용례나 용법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 2015년 12월 23일 자 일본 <산케이뉴스> "전후 70년 '가슴이 아프다'" |
ⓒ 산케이뉴스 |
그날 아키히토가 했던 말은 그해 12월 23일 자 <산케이뉴스> "전후 70년 '가슴이 아프다'"에 구체적으로 보도됐다. 그가 했던 말은 "평화스러웠다면 사회의 각종 분야에서 의미 있는 인생을 보냈을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라며 "매우 가슴이 아프다"라는 것이었다.
요코스카시 홈페이지에 전몰선원 위령비가 어떻게 해설되는지를 살펴보면, 일왕이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 홈페이지는 지난 세계대전으로 민간인들이 대거 희생된 사실을 거론하면서 "세월이 지나 일본이라는 나라는 다시 풍요한 생활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한 뒤 "죽은 사람들의 노고와 슬픔을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애도한다.
이 홈페이지는 '그들의 희생을 딛고 지금의 일본이 번영을 누리고 있으며, 그 노고와 슬픔을 잊지 않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는 설명을 제공한다. 일왕 역시 그런 의미에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던 것이다. 희생자들에게 사죄나 반성의 마음을 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짐의 백성들'이 전쟁 때문에 희생된 데 대해 군주로서 미안하고 비통하다는 마음을 전할 목적이었다.
아키히토는 1995년 12월 21일에도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62회 생일을 이틀 앞둔 그날, 대형 사건들과 제2차 대전으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렇게 답했다.
2017년 11월 27일에도 그는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이때는 일본유족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장에서였다. 그날 발행된 <시코쿠뉴스> '오늘도 여전히 가슴이 아프다'에 따르면, 그는 후쿠다 야스오 총리 등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하고, 전쟁에 의해 혹은 병을 얻어 죽은 많은 전몰자를 생각하면 전후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가슴이 아프다"라고 애도했다.
이중적 메시지 띄우는 일본 총리
이처럼 일왕은 나라에 헌신한 백성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통을 당한 것에 대해 슬픔을 표시할 때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1990년대에도 그런 이유로 가슴이 아팠고, 양위가 임박한 2010년대 후반기에도 그런 이유로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
기시다 총리는 일왕의 신하다. 그 역시 일왕의 화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군국주의 전쟁과 관련한 자리에서 '가슴이 아프다'고 말할 때는 일왕의 용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가슴이 아프다는 기시다의 말은 한국인들이 들을 때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희생에 대한 유감의 뜻이 될 수 있지만, 일본 극우세력이 들을 때는 일왕에 충성하다가 희생된 이들의 노고에 대한 치하의 뜻이 될 수 있다.
이는 기시다가 그 말을 한 주된 동기가 식민지배 피해자들에게 성의 표시를 하거나 위로를 하는 데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군국주의적 함의가 다분한 표현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태용 안보실장은 "국민들께서 한일관계가 정상화되니 이런 좋은 일도 있구나 라고 느낄 수 있도록 저희가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함으로써 기시다 방한에 대한 기대감을 띄웠다. 하지만, 기시다는 "이런 좋은 일도 있구나"라는 느낌을 주기는커녕, 한국까지 와서 군국주의적 함의를 담은 표현을 언급했다. 또 다른 가해, 제2차 가해를 저지른 셈이다. 한국 국민들을 우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전의 모두 발언에서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으면 미래 협력을 위해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발언했다. 성의 표시를 하게 될까 하는 주목을 받는 기시다에게 '굳이 사과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책의 메시지를 면전에서 던진 셈이다.
그런 뒤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 총리가 한국에 와서 한국 국민들을 우롱하는 장면을 옆에서 묵묵히 관찰했다. 가슴이 아프다며 한국 국민과 일본 극우세력에 이중적 메시지를 띄우는 일본 총리의 태도를 그저 남의 일인 양 지켜만 봤다. 한국의 굴욕외교는 이렇게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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