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노동유연화가 나아가야 할 길
[권오성]
시민혁명으로 신분적 구속에서 벗어난 '추상적 인간'이 자신의 의사로 자본에 대한 '종속'에 기꺼이 들어가게 된 것이 근로계약 개념의 출발이다. 산업혁명기 대가족 해체와 도시 빈민 증가 등의 상황에서 근대 산업자본은 대량의 산업예비군을 낮은 임금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한편, 하루 24시간 전체에 걸쳐 노동자를 착취하려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충동이라던 카를 마르크스의 말처럼 자본은 노동자의 시간을 다양한 방법으로 살뜰하게 구속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계급 출현의 물적 토대가 마련된 것이고, 증폭된 계급간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노동법'이다.
▲ 삶과 생애 시간의 함수 |
ⓒ 한국비정규노동센터 |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이라고도 불리는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여가를 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노동시간에 대한 노동자의 자기 결정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독일의 '노동 4.0'은 노동시간과 관련해 '노동시간의 유연화와 노동자의 시간주권 또는 자기결정권 강화'에 특히 주목한 바 있다. 디지털화가 노동시간에 대한 노동자의 자기결정권 확장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과 휴식의 경계, 직업과 사생활의 경계가 흐려지는 결과 실제 노동시간이 길어진다면 이는 결국 일하는 사람의 건강을 해치게 될 수 있음에 유의하라고도 했다. 노동자의 자기결정권 강화가 '자발적 자기착취'로 이어지는 역설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하튼 기술의 발달로 노동시간 및 근무 장소의 유연화가 가능해졌다. 문제는 노동시간과 근무 장소를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것과 사용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앞으로의 발전 방향에 큰 차이를 발생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노동시간 유연화 자체가 아니라, 어떠한 유연화가 되는지가 중요한 문제라고 할 것이다.
▲ 지난 3월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노동시간 개악 저지 윤석열 정부 규탄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종래에도 모든 노동자가 표준근로주(standard workweek)에 따라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국제노동기구(ILO) 제1호 협약 채택 당시에도 제조업에서는 이미 몇 가지 기본적인 교대제가 사용되고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다양한 교대제가 있음은 물론 다른 형태의 유연한 노동시간 제도(flexible working time arrangement)가 활용되고 있다. 한편 노동자의 시간주권 제고와 기업의 경영 효율성 제고를 위한 노동시간 유연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외견상 유사한 제도가 그 도입 목적에 따라 일의 세계에 정반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먼저, 사용자 중심의 유연화에는 교대제(shift work) 등 사업 운영상의 요구에 따라 결정 및 변경되는 일정, 노동시간의 평균화(한국법상 탄력적 근로시간제), 호출 노동(on-call work)이 포함된다.
반면, 노동자 중심의 유연화는 노동자가 스스로 자신의 노동시간에 대해 어느 정도의 선택권이나 영향력을 갖는 노동시간 편성을 말하며, 몇몇 중요한 모델로는 선택적 근로시간제(flexi-time arrangements), 근로시간저축계좌(time-banking), 집중근무주(compressed workweeks) 등이 있다. 물론 사용자와 노동자 요구 모두를 충족하도록 고안된 다양한 유형의 노동시간 편성도 가능하다.
이중 노동자의 시간주권과 관련이 있는 것이 '노동자 중심의 노동시간 편성'임은 물론이다.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근무 일정이나 노동시간에 대해 선택권을 갖거나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노동시간 편성은 노동자의 복지와 '일과 삶의 균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노동시간의 유연화는 기업의 경영 효율성 제고 수단이 아니라, 노동자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할 것이다.
노동자 측의 자기결정권 제고 방안
코로나 팬더믹으로 가속되기는 했지만, ICT 기술의 발전이라는 물적 토대에 기반을 둔 노동시간의 개별화·유연화 경향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할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러한 경향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법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현행 근로기준법상 유연 근로시간 제도를 전반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2018년 근로기준법 개정 이후 정부 정책은 탄력적 근로시간 제도 보완 정책에 집중됐지만, 우리나라의 탄력적 근로시간 제도는 주로 교대 근무를 하는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제도다.
따라서 노동자의 시간주권 강화와 관련해선 오히려 재량 근로시간 제도의 적용 대상 확대가 필요하다. 재량 근로시간 제도를 활용하는 기업은 노동자가 자신의 과업을 약정된 기간 내에 자기 책임으로 이행할 것을 신뢰하고, 따라서 상급자에 의한 출퇴근 통제와 같은 형식적인 노동시간 파악은 이뤄지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약정된 노동의 결과가 기한에 맞춰 나와야 한다는 것이고, 언제, 얼마나 오랫동안, 어디서 일하는가는 노동자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재량 근로시간제는 업무가 과업 지향적으로 부여되고 낭비되는 시간이 적어지며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일 생활 균형' 차원에서도 긍정적이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노동자는 높은 수준의 성과에 대한 요구를 받게 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권한도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도한 업무 부담을 수반하는 비현실적인 과업이 부과됨으로써 노동자의 건강을 해칠 위험이 있다. 이처럼 재량 근로시간제는 노동자에게 과로와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 등 관계 법령에 의한 노동자 건강 보호 조치 강화가 필요하다.
이외에도 일정 수준의 소득보장을 전제로 하는 휴가 제도 개선이 필요하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정한 근속기간 및 출근율의 충족을 전제로 하는 기존의 연차휴가 제도 이외에 모든 일하는 사람의 기본권으로서의 '휴식권' 보장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또한 재택근무의 경우 일과 가정생활 경계의 모호함으로 인해 장시간 노동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연결차단권' 도입에 대한 논의도 필요할 것이다.
생애주기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시간주권
산업구조의 변화와 기술 발전은 노동자가 수행할 작업 자체를 변화시키고, 이는 한편으로는 기존 숙련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숙련요소에 대한 수요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력이 부족한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일과 급속한 기술변화의 시대에서 사용자가 요구하는 일 사이의 '기술 불일치'로 인해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의 활용도 감소와 이로 인한 경제성장의 속도 저하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의 삶은 연속적인데 고용의 불안정으로 인해 일자리는 툭툭 끊기는 불안정성이 심화 된다.
따라서 이제는 정태적인 일자리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동태적인 경력에 대한 권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직무교육에 대한 공평한 접근이 보장돼야 한다. 나아가 사람들이 생애 전체에 걸쳐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고, 하나의 노동 형태에서 다른 노동 형태로 전환할 수 있으며, 사생활과 직업 생활을 조화시킬 수 있도록 보장할 필요가 있다.
급속한 기술 발달 및 이로 인해 기업이 노동자에게 요구하는 기능 변화는 기업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 기업 내에서 노동자를 교육해야 할 유인을 줄이고 있다. 이처럼 종래 내부노동시장이 제공하던 직업 능력 개발 기회가 감소하고 있음에도 외부노동시장이 이를 보충하지 못할 경우, 사회경제적 비경제의 발생은 불가피할 것이다. 외부노동시장 비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개개인의 경력이 원활하게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차원에서 경력 형성 및 발전의 기회를 준비해야 한다.
향후 노동자 자신이 주도하는 개인적인 교육 훈련에 대한 수요와 필요성이 늘어나며 이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인 바, 개인적인 교육 훈련 참여가 어려운 주된 원인은 시간 부족에 있다.
▲ 권오성 성신여대 법대 교수(왼쪽)가 2020년 11월 17일 오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열린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보호방안 마련을 위한 입법 공청회에 진술인으로 참석, 발언하고 있다. |
ⓒ 남소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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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가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5,6월호 '특집' 꼭지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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