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의사들은 '지식의 저주'에 걸려 있다

김동석 춘천예치과 대표원장·작가 2023. 5. 8.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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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의 의료인문학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고 하더라도 환자의 협조가 없으면 좋은 치료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만약 성공률 99%의 임플란트 명의라고 소문난 치과의사에게 식이조절과 운동을 절대 안 하는 당뇨병 환자, 술과 담배에 쩔어서 사는 환자, 잇몸관리를 전혀 안 하는 환자가 몰리기 시작한다면 그 명성은 조만간 사라질 수도 있다. 그래서 협조를 잘하는 환자를 만나는 것이 의사에게는 복이다.

협조를 잘하는 환자가 되기 위해서는 의료진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도 병원문을 나서는 수많은 환자는 과연 모두 자신의 병을 이해하고 온전한 치료를 위해서 스스로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잘 숙지하고 있을까?

의사와 환자 간 소통의 문제는 늘 화두다. 잘 된다면 화두가 될 리 없다. 문제가 많기에 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장애물이 소통을 막는 걸까?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의료 수가에 따른 진료시간이다. 지금 현 상황의 의료 수가 체계에서는 환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는 것이 어렵다. 환자도 어느 정도는 그 사정을 안다. 환자가 몰리는 대형 종합병원에서의 3분 진료가 보편화된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이런 현실은 소통의 소홀함에 어느 정도의 자의적 면책을 가능하게도 해준다. 의사의 양심에 덜 거리낀다고 할까? 그래서 의사마다 빠른 시간 안에 설명의 의무 정도까지는 이행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을 터득하고 있다.

이는 ‘충분한 설명 부족’이라는 꼬리표를 늘 달고 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다.
빠르게 설명하면서 의사들은 환자가 그 설명을 빠르게 이해할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설명을 아주 쉽게 잘한다고 생각하니까. 여기에 진정한 장애물이 있다. 바로 ‘지식의 저주 (The Curse of Knowledge)’라고 하는 ‘미리 알고 있는 자의 오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소통을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된다.

◇ 환자에게 소외감을 주지 마라.
스탠퍼드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한 졸업생이 1990년 아주 단순한 실험을 했다. 피실험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쪽은 누구나 잘 아는 여러 노래의 리듬을 두드리게 하고, 다른 쪽은 그 리듬을 주의 깊게 듣고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아맞히는 것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이 실험에서 두드린 리듬의 노래는 모두 120개인데, 듣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맞춘 곡은 3개 뿐이었다. 2.5%다. 그런데 실험에 들어가기 전, 두드리는 사람에게 듣는 사람이 얼마나 알아맞힐지 물었더니 “50%는 될 것”이란 답이 돌아왔다. 즉 두드리는 사람들은 자기네 메시지가 적어도 둘에 하나는 제대로 전달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누구나 다 잘 아는 리듬을 두드리는 이들은 그렇게 두드리면서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까지 떠올린다. 당연히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 리듬은 듣는 사람들에게는 해괴한 모스 부호에 불과했다. 환자와 대화할 때 전문적인 용어를 남발하는 의사들 대부분은 실험의 두드리는 사람들과 같은 심리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바로 ‘지식의 저주’에 걸린 것이다.

한 조사에 의하면 수술받은 고객을 대상으로 ‘치료의 수술법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나?’를 물었더니 20%가 넘는 환자들이 자신이 받은 수술이 무슨 수술이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서울대병원과 국립암센터 공동조사에 의하면 국내 암 생존자 2,556명 중의 37.1%인 985명이 의사와의 면담이 불충분하다고 답했다.

환자들은 본인의 상태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기를 바라지만 ‘지식의 저주’에 걸린 의사는 환자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것저것 많은 내용을 생략하고 전문용어를 남발한다. 환자가 이해를 못 하면 ‘이렇게 쉽게 설명하는 것을 이해 못 하다니’라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환자들은 의사가 자신의 병을 교과서 속의 보편적 지식의 개념, 정해진 병명으로 개념화한 일반화된 임상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소외감을 느끼는 이유다. 환자는 병명으로 자신을 이해하지 말고, 환자 개개인에게서 나타난 고유한 실존적 현상으로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대장암 2기 사이즈 00cm 환자’, ‘치주염, 임플란트 3개, 치실 미사용 환자’로 자신을 이해하길 바라지 않는다.

◇몰라도 고개를 끄덕인다.
‘지식의 저주’는 의사와 환자 사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직장 내에서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직장에서 유난히 일을 잘하는 직원이 꼭 한두 명 있다.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직원도 유심히 잘 살펴보라. 1가지를 가르쳐 주었을 때 얼마나 이해하고 잘 알아서 하는가 말이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아서 할 것으로 생각한 직원이라면 아마 실망이 이만저만 아닐 수도 있다.

부하직원들에게 열 번을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왜 지난번에 이야기했는데 아직도 이걸 못하고 있냐?”라고 말하지 말라. 열 번까지는 처음 이야기하듯이 알려주어야 한다.

병원에서 일하는 많은 직원은 의사들 앞에서 잘 몰라도 아는 척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다. 이때 의사는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서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나 알기 쉽게 간결한 말로 다시 설명해야 한다. 의사가 직원에게 쉽게 설명하는 법을 터득하면 직원들은 환자에게 그 방법을 풀어낸다. 직원과 환자와의 소통의 선상에도 늘 의사의 ‘말’이 있는 법이다.

눈높이에 맞게 쉽게 잘 설명해 주는 의사가 많아졌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고개를 끄덕이지 말고 다시 물어봐야 한다. 지식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환자의 도움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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