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때문에 협력의 가교 불태워서야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
독일과 달리 일본 G7에 한국 초청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7일 서울공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왔다. 윤석열 대통령의 일본 방문 52일 만이다. 이로써 한일 양국의 셔틀외교가 재개됐다. 기시다 총리는 방한 첫 일정으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방문하고 이어 용산 대통령실에서 윤 대통령과 한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다른 일본 총리도 참배했던 곳이지만, 거기엔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다 순국한 선열들이 안장돼 있다. 그곳을 맨 먼저 찾았다는 것은, 자신의 양국관계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확인시키고 싶다는 뜻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문제 역대 내각의 입장 계승”
“3월 윤 대통령 방일 때 저는 1998년 10월 발표된 일한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사인식과 관련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말씀드렸다. 이런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는다.”
분명한 사과의 표현이 없었다며 그의 방한과 한일 정상간 셔틀외교 재개의 의미를 폄훼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이걸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지금은 말하자면 한일외교의 재활치료 기간이다.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정부의 사과가 수십 차례 있었다. 기시다도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고 강조했다. 그때마다 ‘통절한 반성’ ‘진심으로 사죄’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그는 일본인의 총리이지 한국의 통치권자가 아니다. 그 사정을 우리가 굳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할 것 까지는 없겠다.
그는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에 대한 한국 전문가 현장 시찰단의 파견을 수용하겠다는 뜻도 피력했다. 원전 오염수(일본의 표현으로는 ‘처리수’) 방류에 대해 우리 국민은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의 국민으로서는 당연한 걱정이다. 그렇다고 방류를 원천봉쇄할 수는 없다. 우리가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총리로서 자국민 그리고 한국 국민의 건강과 해양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는 형식의 방류는 인정하지 않을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 말을 외교수사(外交修辭)로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전문가들이 현장을 방문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오염수 방류의 위험성 여부를 밝혀내는 것이 우선적 과제다. 그 결과 문제가 있다고 확인되면 당연히 반대하고 나서야 한다. 반면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흔쾌히 인정해 주는 쪽으로 입장을 정하는 게 좋다. 그런 게 외교다.
기시다 총리는 “수출통제 당국 간 대화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서 그 결과 일본 정부로서 한국을 그룹 A로 추가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 중에 있다”고 밝혔다. 한일 무역분쟁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우리 대법원의 판결과 대구지법 포항지원의 일본제철(구 신일철주금) 국내 자산 동결·압류→압류재산 매각 명령에서 비롯됐다. 일본이 이에 반발해 대한(對韓) 반도체 소재 및 부품 수출 규제, 화이트 리스트 배제 등으로 맞섰다.
독일과 달리 일본 G7에 한국 초청
문재인 정부는 ‘외교적 고려’ 대신 ‘반일감정 자극’으로 대응했다.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의 배 열두 척’을 언급하며 전쟁이라도 벌일 듯한 기세를 보였다. 그의 총신(寵臣)이었던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당시)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죽창가(竹槍歌)를 추임새삼아(아마도) 올렸다. 진보를 자처한 좌파정권이 국수주의로 질주하는 이상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외교관계에서 명쾌하고 완전한 해결이란 있을 수가 없다. 직진은 외교적 방식이 아니다. 우회로도 늘 열어둬야 한다. 국가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협상이다. 거기서 해답을 못 얻으면 남는 선택지는 전쟁 밖에 없다. 그게 국제관계다. 문 정권은 국민의 반일감정을 부추기며 외교·안보·경제적 부담을 국민 몫으로 떠넘겨버렸다. 이제라도 무역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기시다 총리는 한미일 안보협력을 통해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대한 억제력과 대처력 강화에 양국이 의견일치를 이뤘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서 윤 대통령은 “워싱턴 선언은 한미 양자 간 베이스로 합의된 내용”이라면서도 “일본의 참여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워싱턴 선언은 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됐었다. △차관보급 한미핵협의그룹(NCG)의 신설, △핵무기를 탑재한 핵잠수함 등 전략자산의 정기적 한반도 전개, △한국의 핵확산금지조약, 한미 원자력 협정 준수 의지 재천명과 명문화가 그 핵심 내용이다. 민감한 문제를 건드린 셈이지만 가중되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가야할 길’이라 할 수 있다.
기시다는 오는 19일부터 5월 21일까지 진행될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윤 대통령을 초청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이 기간 중 한미일 정상회담을 갖고 다방면에 걸친 협력방안을 논의하게 될 것임을 예고했다. 작년 G7을 주최했던 독일과는 달리 일본이 의장국으로서 우리를 초청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양국사이에 훈풍이 불고 있음을 체감케 하기 때문이다.
양국 정상이 G7정상회의가 열리는 피폭지 히로시마에서 평화기념공원을 방문,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하기로 합의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일본은 무모하게 벌인 태평양 전쟁으로 인류사 최초의 원자폭탄 피폭 국가가 되었다. 그것도 두 차례나! 히로시마 한인 위령비에는 “(전략) 원폭투하로 인해 2만여 명의 한국인이 순식간에 소중한 목숨을 빼앗겼다. 히로시마 시민 20만 희생자 수의 1할에 달하는 한국인 희생자 수는 묵과할 수 없는 숫자이다.(후략)”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남이 일으킨 전쟁이 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우리 동포를 고통과 죽음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일본도 죄 값을 안 치른 게 아니다. 250만명의 군인, 10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전범국의 군인이고 국민이었지만 그들 역시 잔인하고 폭압적인 통치세력에 의한 희생자들이었다. 언제나 그렇다. 명령자와 희생자는 다르다. 한쪽은 국민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면서도 안락을 누린다. 다른 한쪽은 영문도 모른 채 쫓겨 가서 온 산하에, 또 하늘과 바다에 시신으로 내팽개쳐진다.
과거는 되돌릴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미래다. 전쟁을 일으켜 동족 수백만 명을 희생시킨 김일성 집단보다 우리의 국권을 탈취해 식민통치를 한 일본을 더 용서할 수 없다는 의식이 여전히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 날마다 핵무기와 미사일로 위협하는 북한보다 선린(善隣: 이웃하고 있는 지역 또는 나라와 사이좋게 지냄)이 필요한 일본을 더 미워하는 것이 우리의 정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로의 회귀는 지금 멈춰야 한다. 앞으로 양국이 이웃으로서 함께 나아가야 할 미래가 무궁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우리의 적은 ‘과거의 일제’가 아니다. ‘우리민족끼리’ 운운하면서 대놓고 핵 및 미사일 위협을 가하고 있는 북한 김정은 체제야 말로 우리의 경계대상 1호다.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는 미국과 일본의 협력이 절실하다. 생존은 현실의 과제다.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이 땅에서 번영을 구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안전부터 확보해야 한다. 이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나라든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일본이 바로 그런 나라다.
안보 측면에서만이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일본은 우리의 핵심적 파트너다. 과거 일본은 우리 산업 발전의 교과서였다. 우리는 일본을 따라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일본 경제가 많이 위축되긴 했지만 여전히 세계 제3위의 경제대국이다. 흔히들 ‘한국은 제조업 강국, 일본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강국’이라고들 한다. 한국이 일본의 제조업을 제쳤지만 소부장에선 여전히 뒤쳐져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런 추세 자체가 일본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현실을 말해 준다. 제조업에서 우리가 후발 산업화 국가들에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과학기술 및 소부장 산업의 비약적 발전만이 우리의 지위를 지켜줄 수 있다. 시간을 놓치면 낙오를 못 면한다.
일본은 위축되긴 했지만 아직도 제조업·소부장 양쪽에서 공히 강국이다. 우리는 해방 78년 동안 엄청난 속도로 추격해 왔다. 이제는 일방적 흐름이 아니라 쌍방적 흐름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한국과 일본이 적절한 협력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일본에게도 이는 기회다. ‘민족감정’이 안보강화와 경제발전의 허들(hurdle)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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