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미·영 위기 때 나섰다…"찰스3세에겐 너무 큰 신발" [김필규의 아하, 아메리카]
6일(현지시간)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대관식이 열린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203개 국가와 단체를 대표하는 2300여 명의 인사가 자리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 등 각국 정상이 직접 참석했지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모습은 결국 보이지 않았다. 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관식 불참 바이든 대통령
백악관 브리핑에서 왜 바이든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느냐는 기자 질문에 카린 장 피에르 대변인은 명확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둘이 이미 만난 적이 있으며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모호한 대답이 전부였다.
정적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를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지난 3일 나이절 패라지 전 영국 독립당 대표를 만난 그는 "(바이든이)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매우 무례하다"고 비난했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백악관 집무실에 놓여있던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흉상을 치워 양국 간에 이슈가 되기도 했다.
바이든의 '노쇼(No Show)'를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영·미 간의 미묘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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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도 안 왔다"
BBC는 바이든 대통령의 불참 소식을 전하면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영국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한 이는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1775년 미국 독립전쟁부터 1812년 미·영 전쟁까지 치르는 동안은 서로 행사에 참석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1930년대 대서양 횡단 항공여행이 시작되기까지는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을 오래 비우고 갈 수도 없었다.
그러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이 기회가 됐다.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참석 여부가 주목됐지만, 불참을 결정하고 대신 특사를 보냈다.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다.
70년이 지난 2023년, 버킹엄 궁이 보낸 초대장이 또 다시 응답받지 못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의 대응도 입길에 올랐다.
백악관 브리핑에서 한 기자는 장 피에르 대변인에게 "미국 대통령이 영국 대관식에 못 간다는 것은 비행기가 없던 한참 옛날의 일"이라며 "이번 바이든 대통령의 불참을 영국 국민은 '거절'로 볼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인들에겐 '왕실 카다시안'
대통령의 대응과 달리, 이번 왕실 행사에 대한 미국 국민의 관심은 상당하다.
여행 관련 솔루션 업체 트래블포트에 따르면 대관식이 있던 지난 주말, 영국행 항공편을 가장 많이 예약한 나라는 단연 미국이었다.
인도와 호주, 캐나다 등 영연방 국가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코네티컷에 사는 도나 워너도 그중 한 명으로, 지난 2일 일찌감치 런던에 들어왔다.
'왕의 행렬'이 시작될 버킹엄 궁 앞, 목 좋은 곳에 자리를 맡아두기 위해서다. 텐트와 침낭, 가재도구를 가져와 며칠째 아예 캠핑에 들어갔다.
영국 왕실 광팬으로 이미 언론에 몇 차례 소개된 그는 1986년 왕실 결혼식을 구경 온 뒤, 지금까지 거의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영국 왕실 행사를 챙기고 있다.
그의 주변에도 성조기와 유니언잭을 함께 장식한 다른 텐트들이 눈에 띄었다.
"찰스에게 우리가 당신을 지지하고,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할 거라는 이야기를 꼭 전해주고 싶다"는 게 워너의 이야기다.
영국 관광청에 따르면 5월 한 달간 영국을 찾은 미국 관광객들이 쓴 돈은 4400만 파운드(약 734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대관식에 들어간 돈이 1억 파운드(약 1668억원) 정도니 총비용의 40% 이상을 미국인들이 채워주고 가는 셈이라고 영국 데일리메일은 보도했다.
영국 왕실 관련 글을 써 온 스트라이커 맥과이어 전 뉴스위크 기자는 "미국인들은 왕실을 둘러싼 모든 화려함을 좋아한다"며 미국 리얼리티쇼 스타를 빗대 "이들을 '왕실 카다시안'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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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 호감도, 여왕에 못 미쳐
그러나 이런 왕실에 대한 인기가 찰스 국왕 개인으로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 모습이다.
지난해 2월 미국 여론조사업체 유고브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여왕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미국인은 61%나 됐다.
반면 찰스 3세에 대한 호감도는 아들인 윌리엄 왕자는 물론, 사촌들에도 못 미쳐, 왕실 인사 가운데 9위를 기록했다.
특히 위기 때마다 영·미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전임자의 그림자는 찰스 국왕에게 무거운 부채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957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백악관 면담을 통해 2차 대전 이후 영·미 연합의 결속을 다졌고, 1982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승마 회동은 포클랜드 전쟁으로 인한 긴장을 푸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신의 생애 첫 야구경기 관람을 야구 광팬이던 조지 HW 부시 대통령과 함께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영국 왕실의 국빈으로 초대해 "잊을 수 없는 경험"이란 찬사를 받아냈다.
로버트 트레이넘 조지타운대 겸임교수는 "엘리자베스 여왕은 재임 기간, 미국 대통령을 무려 13명을 만났다"며 "각 행정부의 성격과 특성을 잘 이해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현재 영·미 사이엔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과 중국 대응, 오커스(AUKUS, 미국·영국·호주 안보 동맹) 협력 등 어느 때 못지않은 민감한 현안이 놓여 있다. 영국 내에서도 과연 신임 국왕이 전임자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날 대관식에 초청받아 온 현역 군인 게리 트런트는 "(이 자리가) 찰스에겐 자신이 신기에 너무 큰 신발"이라면서 "전 세계의 사랑을 받아 온 자신의 어머니를 따라가는 게 벅찰 수 있다"고 말했다.
런던=김필규 특파원 phil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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