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많은 분이 힘든 경험, 가슴 아파”
한·일 정상 12년 만에 셔틀외교
한·일 관계의 최대 걸림돌인 과거사 문제에 한 발짝씩 더 나아간 양국 정상은 이달 일본 히로시마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 도중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탑에도 공동 참배하기로 약속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조사를 위해 한국 전문가 시찰단의 이달 23일 후쿠시마 원전 현장 파견에도 합의했다. 일본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외 양자 차원에서 검증을 수용한 건 한국이 처음이다. 이에 윤 대통령도 추후 한·미 핵협의그룹(NCG·Nuclear Consultative Group)의 한·미·일 협의체로의 확대 가능성을 열어놨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이날 오후 용산 대통령실에서 102분간 소인수·확대 회담으로 마주 앉았다. 양 정상의 만남은 3월 16일 윤 대통령의 방일 이후 52일 만이자 윤 대통령 취임 후 1년 새 네 번째 한·일 정상회담이다. “셔틀외교의 복원에 12년이 걸렸지만, 우리 두 사람의 상호 왕래에는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윤 대통령의 말처럼 두 달도 안 되는 기간 안에 한·일 정상이 양국을 오가면서 ‘셔틀외교’는 명실상부해졌다.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기시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두 차례 발언했다. 먼저 회견 모두발언.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3월 6일에 발표된 조치에 관한 한국 정부에 의한 노력이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분이 과거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면서도 미래를 위해 마음을 열어주신 데 대해 감명받았다. 저도 당시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수많은 분이 매우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한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일 양국 간에는 수많은 역사와 경우가 있지만,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온 선인들의 노력을 이어받아 미래를 위해 윤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측과 협력해 나가는 것이 일본 총리로서의 저의 책무”라고 덧붙였다.
한국 시찰단, 23일 후쿠시마 방문…IAEA 이외 첫 해외 검증
이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한 말이냐”는 기자 질문에 기시다 총리는 “역사 인식과 관련해서는 1998년 10월에 발표된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그 당시 힘든 경험을 하신 분들에 대해 제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린 것”이라고 답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담겼던 “통렬한 반성과 사죄”와 같은 구체적인 사과는 하지 않았다.
양 정상은 기자회견에서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 정상회의 때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함께 참배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일본 측에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를 함께 추모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해 온 것은, 앞으로도 말과 행동으로 과거사에 대해 진정성 있는 행보를 이어가겠다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올여름으로 방류가 예상되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와 관련해 양국은 한국 전문가 시찰단을 현장에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기시다 총리는 회견에서 “한국 국내에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는 점은 잘 인식하고 있다”며 “한국 분들이 이 사안에 대해 이해해 주실 수 있도록 이번 달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에 대한 한국 전문가 시찰단 파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총리로서 한국 국민의 건강과 해양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는 형식의 방류는 인정하지 않을 것을 말씀드린다”고도 했다.
회견 후 일본 측은 별도로 “23일 한국 시찰단을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다만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문제는 이번 회담의 의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앞으로 논의될 기회가 있다면 후쿠시마 오염수와 같은 입장에서 접근하게 될 것”이라며 “국민 불안감 해소, 객관적이고 투명한 방법으로 검증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안보 이슈와 관련해 윤 대통령은 지난달 미국 국빈 방문 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합의해 발표한 “‘워싱턴 선언’ 조치들에 일본의 참여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한·미 NCG의 한·미·일 NCG로의 확대 가능성에 관한 질문에 대해 “한·미 워싱턴 선언은 완결이 아니고 계속 문의하고 공동 기획, 공동 실행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채워나가야 하는 입장”이라며 “이것이 궤도에 오르면 일본도 미국과의 관계에서 준비가 되면 언제든지 같이 협력할 수 있는 문제”라고 답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일본도 미국과 필요하다면 미·일 간 양자 차원의 확장억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미 간 NCG가 정착 및 활성화된 이후 한·미·일 간 확장억제에 대한 논의를 추가할 수 있다는 얘기지, 지금 막 만든 한·미 간 NCG를 3자나 4자로 확대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에 대한 여야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해 현장시찰단 파견에 합의하는 성과를 이뤘다”며 “‘한·미·일 3각 공조’를 통해 확고한 안보태세를 구축해 줄 것”이라고 평가했다. 반면에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역사를 내다 판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다음은 공동 기자회견 일문일답.
Q : 한·일 셔틀외교가 12년 만에 복원됐는데.
▶윤 대통령=양국의 관계 개선이 이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양국이 협력해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시다 총리=양국 관계 강화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은 저도 실감하기 때문에 이번에 조기 방한을 결단하게 됐다.
Q : 한·미가 핵협의그룹(NCG) 창설에 합의했는데, 여기에 일본도 참여하나.
▶윤 대통령=워싱턴 선언은 한·미를 베이스로 합의된 내용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참여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한·미 간 워싱턴 선언이 완결된 것이 아니고 궤도에 오르면 일본도 미국과의 관계에서 준비가 되면 언제든지 같이 협력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Q :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관련 우려가 있는데.
▶기시다 총리=6월에는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최종 보고서가 정리될 예정인데, 보고서도 잘 반영시켜 저희들은 국내적인 절차를 진행하겠다. 그리고 그때도 꼭 한국 측하고는 의사소통을 하겠다. 이러한 노력을 거듭하면서 한국의 많은 분의 우려, 불안감에도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일본 강진 피해를 애도하며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했고 기시다 총리도 감사를 표시했다. 기시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수단에서 일본 국민들이 대피할 때 목숨이 위태로운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국이 큰 도움을 주신 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도 했다.
권호·현일훈 기자 kw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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