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영웅’ 교향곡, 그 시절 악기 소리로 들려준다

류태형 2023. 5. 8.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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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베허(왼쪽)가 지휘하는 샹젤리제 오케스트라가 6년 만에 내한 한다. 클래식 명곡의 작곡 당시 악기로 연주하는 원전연주 악단이다. [사진 크레디아]

“작곡가 당대의 악기와 활로 만드는 소리는 가볍고 투명해요. 다른 문법의 음악 언어죠. 같은 곡도 클렘페러·카라얀·토스카니니 지휘가 다르듯, 우리 연주는 다른 원전연주 지휘자인 가디너·야콥스와 다르게 들릴 겁니다.”

원전연주 거장 필리프 헤레베허(76)의 말이다. 이번이 네 번째 내한인 그는 오는 1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0일 부천아트센터에서 샹젤리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앞서 2006년 바흐 ‘B단조 미사’, 2013년 모차르트 ‘레퀴엠’과 교향곡 39·40·41번, 2017년 베토벤 교향곡 5·7번을 내한공연했다. 그가 6년 전 맨손으로 지휘해 들려준 연주는 당대 베토벤을 떠올리게 했다. 옻칠 색 목관악기는 차분했고, 밸브 없는 내추럴 호른은 박진감 넘쳤다. 트라베르소(가로피리)는 리코더처럼 낭랑했고, 빨간 나무채를 휘두르던 팀파니는 다이내믹했다.

벨기에 헨트 출신인 헤레베허는 의사인 아버지를 이어 의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헨트 음악원에서 지휘·작곡을 공부했다. 낮에는 정신과 전문의로 일하고, 밤에는 콜레기움 보칼레 헨트를 결성해 음악을 했다. 그러다 아르농쿠르와 레온하르트의 바흐 칸타타 전곡 앨범에 참여하며, 흰 가운을 벗고 음악을 선택했다. 1991년 고악기로 연주하는 샹젤리제 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98년부터 현대 악기로 구성된 로열 플랑드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레퍼토리를 넓혔다.

이번 내한에서 헤레베허와 샹젤리제 오케스트라는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주피터’와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연주한다. “한국에 자주 올 수 없으니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대표하는 최고 작품을 준비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둘 다 계몽주의 정신과 관련 있고, 긍정과 희망의 정서가 담겨 있다. 고난과 시련을 딛고 얻은 인간의 승리를 느낄 수 있어 현재 우리에게 힘이 되는 곡들”이라고 덧붙였다.

헤레베허는 각 곡에 대한 깊이 있는 견해도 내놨다. ‘주피터’에 대해선 “오페라를 작곡하며 발전시킨 극에 대한 재능과 대위법(둘 이상의 선율을 결합하는 작곡법)에 대한 재능이 결합해 탄생했다. 마지막 악장의 대위법과 푸가를 들어보면 그 천재성을 알 수 있다”고, ‘영웅’에 대해선 “대위법의 발전 속에 교향곡 9번 ‘합창’으로 가는 길이 놓여 있다. 당대 프랑스 작곡가 작품을 연상시키는 관악과 팀파니는 프랑스 혁명에 우회적으로 경의를 표한 것”이라고 말했다.

여느 원전연주 개척자들처럼 헤레베허의 여정도 바로크 음악에서 시작됐지만, 그의 관심 폭은 훨씬 넓다. 바흐의 칸타타에 나오는 가사 해석에 만전을 기하는 그는 “말러 가곡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에 나오는 시 작품들에서도 순수한 애정을 느낀다”고 했다. 또 “베토벤은 소수의 엘리트를 위해 작곡했다. 청중은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베토벤 음악에 익숙했다”며 “요즘 클래식 관객은 경기 규칙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테니스 경기를 열정적으로 보는 관중 같다”고 지적했다. 클래식 청중의 지적 각성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17세기 작곡가 샤이트나 쉬츠를 알면 19세기 브람스나 말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브람스를 공부하고 싶다면, 바흐·샤이트·쉬츠를 먼저 ‘읽어야’ 합니다. 브람스의 몇몇 곡은 낭만적 화성을 가진 쉬츠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로크·고전·낭만은 서로 통해요. 제가 스트라빈스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곡을 지휘하는 이유입니다.”

샹젤리제 오케스트라는 슈만·브람스·브루크너·말러까지 연주하며 원전연주의 스펙트럼을 후기 낭만시대까지 넓혔다. 창단 30주년이던 지난해에는 말러의 ‘대지의 노래’를 연주했는데, 1911년 지휘자 브루노 발터의 뮌헨 초연 당시 오케스트라 색채를 구현했다고 한다. 헤레베허는 “가장 중요한 음악적 꿈 하나를 실현했다”고 그날의 감격을 전했다.

70대 중반을 넘어선 거장은 아직 끝내지 못한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같은 곡들을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미 녹음한 곡들도 다른 방식으로 연주해보고 싶다”며 “앞으로 얼마나 더 지휘자로 활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내면으로 끊임없이 역사를 여행하는 내 직업은 큰 축복”이라고 말했다.

류태형 객원기자·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ryu.tae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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