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일만에 대좌한 尹-기시다… 과거사 남겨놓고 '반도체·워싱턴 선언' 강화(종합)
화이트리스트 회복 재확인… 반도체 공급망 공조
기시다 "슬픈 일 가슴 아프게 생각" 사죄 대신 유감
지난 3월 정상회담 후 52일 만에 다시 마주 앉은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경제와 안보 분야에서의 협력 의지를 다시 확인했다. 한국의 반도체 제조업체와 일본의 관련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이 반도체 공급망 공조 강화를 꾀하자는 구체적인 논의는 물론 지난 국빈 방미의 최대 성과로 꼽히는 '워싱턴 선언'에서 향후 일본의 역할도 새롭게 제시됐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총리의 첫 입장도 나왔다. 다만 기시다 총리의 입에서 직접 '사죄'나 '사과'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았다. 윤 대통령도 "과거사 정리가 안 되면 미래협력이 없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경제와 안보 분야에서의 성과와 달리, 과거사에 대한 국민들 판단과 정치권에서의 논란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尹 "워싱턴 선언은 완결된 게 아냐… 日 참여 배제 안 해"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7일 오후 용산 대통령실에서 한일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한 협력 대응과 경계 확대에 대해 3월 정상회담에서보다 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안보는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간 협력 범위가 가장 넓어질 것으로 꼽혔던 분야로 한국과 미국은 최근 정상회담을 통해 '워싱턴 선언'을 채택하는 등 북한에 대한 확장억제를 강화했다. 한미가 핵협의그룹(NCG) 신설에 합의하는 등 속도를 내는 가운데 한일도 안보 차원에서 보조를 맞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던 대목이기도 했다.
특히 윤 대통령은 한미 간의 확장억제 강화 방안이 담긴 '워싱턴 선언'이 한미일 간 협력으로 확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일본 참여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윤 대통령은 "워싱턴 선언은 완결된 것이 아니고 계속 논의하고 또 공동기획, 공동실행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내용을 이제 채워나가야 하는 입장"이라며 "먼저 이것이 궤도에 오르고 일본도 미국과 관계에서 준비가 되면 이건 뭐 언제든지 같이 협력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윤 대통령은 북한의 연이은 도발을 언급하며 "한반도와 일본은 물론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중대한 위협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고 말했다. 기시다 총리 역시 북한의 도발 행위를 "힘에 의한 일방적인 현상 변경"이라고 지적하며 한미일, 3자간 억제력과 대처력을 강화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11월에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북한 미사일 데이터의 실시간 공유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전되고 있음을 환영한다"고 설명했다.
한일을 넘어, 한미일 간 안보 협력 체계가 더 강화될 것임을 시사한 대목도 눈에 띈다. 두 정상 모두 G7 히로시마 회의에서 한미일 정상간 안보 체계 강화 논의가 심화할 것임을 예고했다. 윤 대통령은 "작년 11월 프놈펜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북한 미사일 경보 정보의 실시간 공유와 관련한 실현 방안에 대해 당국 간 논의의 진행을 환영하고 앞으로도 한미일 안보 협력 이어가기로 했다"고 밝혔고 기시다 총리 역시 "G7에서 한미일 정상회의를 개최해 더 논의를 심화시키겠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정상회담에 앞서 상호 관심 사안에 대한 협의를 진행한 바 있다.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3일 서울에서 아키바 다케오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과 한일 안보실장 회담 및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경제안보대화를 진행해 북한 및 지역·국제정세 등 상호 관심 사안에 대해 폭넓게 협의하기도 했다. 양측은 지난 3월 정상회담 계기로 출범에 합의한 한일 NSC 경제안보대화의 출범 회의를 갖고 공급망, 첨단기술 등 분야에서 한일 간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강화된 반도체 협력 의지… 미래세대 협력 위해서도 기금 출범
경제 분야에서의 성과도 선명하다. 두 정상은 이날 한국을 일본의 수출 우대국 조치 대상인 그룹A(옛 화이트국가·화이트리스트)로 원상회복하기 위한 절차를 착실히 이행할 것을 재차 확인했다. 경제협력 회복 분위기를 기반으로 한국의 반도체 제조업체와 일본의 관련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이 반도체 공급망 공조 강화를 꾀하자는 계획도 나왔다.
앞서 윤 대통령의 일본 방문으로 지난 3월 정상회담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 해제, 화이트리스트 복원 등과 관련해 기시다 총리와 합의한 바 있다. 이에 한국 정부는 과거 수출규제와 관련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했고, 일본 정부도 수출 관련 원상회복 조치를 밟고 있다. 기시다 총리도 공동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수출 통제 당국 간 대화도 적극적으로 이뤄져서 그 결과 일본 정부로서 한국을 그룹A로 추가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 중이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은 또 "지난 3월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외교안보 당국 간 안보 대화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간 경제 안보 대화 그리고 재무장관회의 등 안보경제 분야의 협력체가 본격 가동되고 있음을 환영했다"고 설명했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2일에 인천에서 재무장관회담이 7년 만에 개최돼 재무 대화를 재개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부연했다. 한일 재무장관 회담은 한국 기재부 장관과 일본 재무상 등 양국 재무당국 수장이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채널로 2016년 8월 이후 중단됐다가 이달 초 다시 개최됐다.
미래세대 협력과 국민 교류를 위한 성과도 설명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3월 저의 방일 계기에 전경련과 경단련이 설립하기로 한 한일 미래 파트너십 기금이 정식 출범 앞두고 막바지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우리 두 사람은 한일 미래 세대의 교류 확대를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필요한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저와 기시다 총리는 한일 양국의 인적 교류 규모가 올해 들어 3개월 만에 200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된 것을 환영한다. 양국 국민이 서로에 대한 이해 깊이 하고 우정과 신뢰 쌓아가기 위해서는 미래세대의 교류 중요하다는 데 인식 같이했다"며 "양국 정부 차원에서도 청년 중심으로 한 미래세대 교류 확대하기 위해 구체적 방안 협의해나가기로 했다. 한일 양국 간 인적 교류가 크게 늘어가는 추세를 감안해 수도권뿐 아니라 지방 간 항공 노선도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회복해 노력해나가자고 했다"고 덧붙였다.
기시다 총리는 "양국의 미래 세대 간 교류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에 한국과 제네시스 프로그램의 대면 교류를 전면적으로 재개하고 교류 인원수를 작년 대비 2배로 늘릴 방침을 결정해 윤 대통령께 공유했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이번 회담에서는 우주, 양자, 인공지능(AI), 디지털 바이오, 미래소재 등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공동 연구와 연구·개발(R&D) 협력 추진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다고 양국 정상은 설명했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3월 회담에서 양 정상이 제시한 방향성에 따라 양국 간 대화와 협력이 이 두 달 사이에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아쉬운 과거사 정리… 기시다 유감 표명했지만 '사죄·사과' 없어
한일정상회담에 앞서 국민들과 여론의 관심이 높았던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 등 예민한 사안도 다뤄졌다. 기시다 총리는 한국 정부가 발표한 '제3자 변제' 방식의 강제징용 피해 배상 방안에 대해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기시다 총리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공식 석상에서 개인적인 유감을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기시다 총리는 '사죄'나 '사과'와 같은 직접적인 표현은 피했다. 이에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는 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한 말이냐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선명하게 답변하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는 "이 말은 그 당시 힘든 경험을 하신 분들에 대해서 제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씀드린 것"이라고만 짧게 답했다. 그러면서 "어려운 시기 극복해오신 선조들의 노력을 계승해 그야말로 미래를 위해 윤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측과 협력을 해서 양국 국민에 이익이 되는 협력관계 구축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3월 윤석열 대통령이 방일하셨을 때 저는 1998년 10월 발표된 일한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과 관련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명확하게 말씀드렸다"며 "이 같은 정부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1998년 10월 발표된 일한 공동선언은 "식민 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를 밝힌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의미한다.
기시다 총리는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한 한국 내 우려를 잘 알고 있다며 시찰단 파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기시다 총리는 "한국 국민들이 이 사안에 대해 이해해 줄 수 있도록 이번 달에 후쿠시마 제1원전에 대한 한국 전문가 시찰단 파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며 "일본 총리로서 자국민, 한국국민의 건강과 해양 환경에 나쁜 영향을 주는 방식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시찰단 파견을 저희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한다"며 "한국 측과 소통을 하면서 한국의 많은 분들의 우려, 불안감에도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배경환 기자 khbae@asiae.co.kr
이기민 기자 victor.lee@asiae.co.kr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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