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대신 가달라"…'김민재 닮은꼴' 심판에 나폴리 뒤집혔다
"김민재 선수 '월드클래스' 맞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두 눈으로 확인했어요.(웃음)"
'괴물 수비수' 김민재(27·나폴리)의 판박이로 유명한 정동식(43) 프로축구 K리그 심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탈리아 나폴리를 다녀온 여운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김민재(27)의 소속팀 나폴리는 지난 5일 우디네세와의 2022~23시즌 이탈리아 세리에A 33라운드 경기에서 1-1로 비겼다.
승점 80을 기록한 나폴리는 2위 라치오(승점 64)에 승점 16 앞서 남은 5경기 결과와 관계없이 우승했다. 나폴리가 '스쿠데토(이탈리아어로 작은 방패·세리에A 우승컵 애칭)'를 차지한 건 팀의 전설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끌던 1989~90시즌 이후 무려 33년 만의 일이다.
올 시즌 나폴리 유니폼을 입은 김민재는 루치아노 스팔레티(64)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 속에 부동의 주전 센터백으로 활약했다. 나폴리가 지금까지 치른 리그 33경기 중 32경기를 뛰었다. 1경기는 스팔레티 감독의 배려로 체력 안배 차원에서 빠졌다. 김민재가 이끄는 나폴리 수비진은 올 시즌 리그 최소 실점(23골)을 기록 중이다. 정 심판은 지난달 26일부터 2일까지 나폴리를 방문했다.
5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에서 만난 정 심판은 "김민재 선수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경기를 직관하며 김민재 선수를 응원하고 싶었다"면서 "나폴리 경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새벽에 일어나 전부 챙겨봤다. 또 세리에A 심판들의 판정을 직접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 이탈리아로 떠났다"고 말했다.
2022년 대한축구협회 '올해의 심판상'을 수상한 정 심판은 매끄러운 경기 운영과 정확한 판정을 내려 '그라운드의 포청천'으로 불린다. 주심으로만 K리그 185경기를 본 11년차 베테랑이다. '김민재 닮은꼴'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김민재가 세리에A에 진출한 지난해 여름부터다. 김민재는 키 1m90㎝, 체중 87㎏. 정 심판은 1m83㎝에 85㎏다.
이미 몇 주 전부터 나폴리는 역사적인 우승을 자축하는 시민들로 축제 분위기였다. 시내 곳곳엔 나폴리의 구단 상징인 푸른 물결로 뒤덮였다. 이런 가운데 정 심판이 나타나자 나폴리는 발칵 뒤집혔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된 정 심판의 나폴리 방문기는 일주일 만에 조회 수 213만(1편 기준)을 넘길 만큼 폭발적인 인기다.
정 심판은 "외모가 비슷한 탓에 나폴리 공항에 내리자마자 시민들의 사인과 촬영 요청이 쏟아졌다"면서 "김민재가 아니라고 바로잡았는데도 '킴(Kim)'을 외치면서 따라왔다"고 말했다. 나폴리 시내로 나가자 그를 보기 위해 몰린 인파로 거리가 마비될 정도였다. 지나가던 차가 그를 보기 멈췄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줄을 섰다. 마치 팬미팅 같았다.
정 심판은 종이 뒷면에 이탈리아어로 '김민재 아닙니다. 닮은 사람입니다'라는 문구를 써서 들고 다녔지만, 팬들은 개의치 않았다. 정 심판은 "일부 팬들은 '당신이 김민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들에겐 얘기하지 마라. 그들에게 김민재는 우상인데, 외모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실망하겠나'라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외모가 비슷하기만 해도 팬들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진짜 김민재 선수가 이곳에서 받는 사랑과 인기는 상상하기 어려웠다"면서 "불과 한 시즌 만에 레전드 반열에 오른 김민재 선수가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폴리에 나흘간 머물며 약 3000명의 시민들과 사진을 찍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심판은 또 "한 팬이 다가와 '김민재 대신 당신이 한국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아라. 그렇게 해준다면 나폴리는 언제든 두 팔 벌려 당신을 환영할 것'이라고 했다"면서 "김민재 선수가 힘든 훈련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팬의 진심이 느껴지는 농담이었다. 나는 이미 육군 학사장교로 임관해 3년4개월간 복무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탈리아어가 짧아 포기했다"며 웃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금메달의 주역인 김민재는 병역 혜택을 받았다. 지난해 6월 예술·체육요원으로 등록했고, 다음 달 훈련소에 입소해 3주간 군사훈련을 받을 예정이다.
그는 이번 일정 중 나폴리 홈구장인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스타디움에서 열린 살레르니타나와의 31라운드 경기(1-1무)를 관전했다. 관중석으로 향하는 정 심판을 본 많은 나폴리 팬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중요한 경기에 김민재가 결장한다고 생각해서다. 정 심판은 "경기장에 입장하는 데 많은 팬들이 '킴, 지금 중요한 경기가 코앞인데 왜 여기 있어?'라며 놀랐다.
'빨리 그라운드로 내려가 몸 풀어'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김민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야 팬들은 안심했다. 정 심판은 "이날 나폴리가 이겻다면 우승이 확정되는 경기였는데, 역사의 현장을 놓쳐서 아쉬웠다"면서도 "김민재 선수가 지금처럼만 해준다면 언젠가 마라도나처럼 이름을 딴 경기장이 생기지 않을까"라며 미소 지었다.
정 심판은 아쉽게도 김민재 경기에서 주심을 본 적이 없다. 그는 "(김민재가 K리그1에서 활약하던) 2017, 18년에 K리그2(2부) 심판이었다. 당시 김민재 선수도 신입 선수였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내가 김민재 선수가 뛴 경기에서 대기심을 봤을 가능성은 있다"고 했다.
'김민재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하고 싶냐'고 묻자 정 심판은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겠다"고 했다. 그는 "나도 한때는 축구 스타가 돼 유럽 리그와 월드컵 무대를 누비는 게 꿈이었다. 김민재 선수 덕분에 원 없이 대리만족하고 있다. 그가 더 높은 곳에 오르길 응원한다"고 힘줘 말했다.
정 심판은 어린 시절 국가대표를 꿈꾸는 축구 유망주였다. 신정초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해 중대부중-중대부고 등 명문팀에서 수비수로 뛰었다. 이천수(당시 부평고), 이동국(당시 포철공고), 차두리(당시 배제고) 등 특급 공격수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면서 실력의 한계를 느꼈다. 그는 선문대 1학년 때 과감하게 축구를 접었다. 대신 심판이 되기로 했다.
선수 시절부터 "심판 판정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선수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선수로 이루지 못한 꿈 대신 심판이 돼 '공정한 그라운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선수로 이루지 못한 '최고'의 꿈을 심판으로 이루고자 한 것이다. 정 심판은 2001년 축구 심판이 됐고, 2013년부터 K리그 심판으로 뛰고 있다.
그는 "심판은 존재감이 없어야 '잘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선수들에게 공정한 판정을 하면서도 경기는 팬들이 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물 흐르듯 흘러가도록 운영해야 한다. 때론 '투명 인간' 같아야 하는 직업"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선수들과 팬들이 주연이라면 심판은 조연"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김민재 선수를 닮았다는 얘기를 주목 받기 시작했다. K리그 경기가 끝난 뒤 사진 요청은 물론 사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팬도 생겼다.
정 심판은 "작은 아버지가 '독도는 우리땅'을 부른 가수 정광태다. 어머니도 동네 가요제에 자주 나가서 입상했다. 나도 연예인의 끼를 물려 받은 것 같다. 대중의 관심이 감사하고 좋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무엇보다 아들 현우(12), 현수(10), 현찬(7)이 영상 속 아빠의 모습을 보고 좋아한다. 친구들에게도 아빠가 김민재처럼 멋있는 축구 심판이라고 자랑하는 모양이다"라고 흐뭇해 했다.
정 심판은 자신의 대한 관심이 심판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상황마다 최선을 다해 판정을 내리지만 팬들은 심판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경기 중 '정신 차려 심판' '눈 떠라 심판'을 외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들들을 한 번도 내가 주심을 보는 경기에 못 데려갔다.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빠가 욕 먹는 상황이라도 벌어지면 충격과 상처를 받을까 걱정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나는 현재의 관심을 즐기는 데 그치지 않겠다. 팬들과 소통하는 기회로 삼겠다. 나를 통해 심판들의 이야기가 더 알려지고, 더 많은 심판 지원자들이 생기고 그래서 저변이 확대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털어놨다.
K리그1 심판은 수당을 받는다. 경기당 주심은 200만원, 부심은 110만원이다. 대기심은 50만원, 비디오판독(VAR) 심판은 60만원이다. 한 경기 주심을 보면 그 다음주는 대기심이나 VAR 심판을 맡는다. 한 달 평균 4경기가 배정된다. 시즌은 보통 9개월 정도다. K리그 심판은 1·2부를 합해 총 40~50명이다. 1부 심판의 경우 많으면 연간 4000~5000만원을 받는다. 2부 심판은 2000~3000만원 수준이다. 정 심판은 "1부 심판이 아니면 본업만으로는 4~5인 가족을 먹여 살리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정 심판은 'N잡러'다. 본업인 축구 심판 외에도 두 가지 일을 더 하는 '쓰리잡'이다. 그는 올해부터 서초구 환경공무관(환경미화원)으로 근무 중이다.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당당히 합격했다. 그는 "아이들이 크면서 생활비는 물론 학원비까지 벌어야 했다. 그동안은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만 했는데, 올해부터는 꾸준히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직업을 갖기로 했다"면서 "심판으로 뛰면서 체력은 자신 있었다. 윗몸일으키키, 왕복 달리기, 모래주머니 옮기기 등 웬만한 체력 테스트에선 다 1등이었다. 준비된 환경공무관"이라고 자랑했다. 이어 "전성수 서초구청장님의 아낌없는 지원 덕분에 빨리 업무에 적응했다"고 덧붙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1999년부터 혼자 살며 '세븐잡'까지 해봤다. 신문과 우유 배달을 한 뒤, 노숙자 복지관에서 근무했다. 당시 월급은 50만원. 그러면서 신용카드 영업, 스포츠용품 판매도 했다. 퇴근 후엔 대리운전, 주말엔 막노동도 했다. 목욕탕에서 세신사 보조를 한 적도 있다. 심판 일까지 병행하며 매일 2~3시간 잤다. 2000원 가지고 시작해서 20대 중반에 1억원을 모았다. 그런데 사기를 당해 모두 잃었다. 정 심판은 "전재산을 잃고는 죽고 싶었다. 실제로 한강다리로 갔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선수도 심판도 제대로 못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다시 일어서기로 했다"고 털어놨다.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그는 K리그 최고의 심판이 됐다. 힘들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일은 편안한 편이라고 했다. 그는 평일 오전 6시에 출근해 오후 3시까지 근무한다. 퇴근 후엔 택배 배송 아르바이트를 추가로 2시간 한 뒤, 헬스장에서 체력 운동하고 오후 9시에 잔다. 정 심판은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은 사실상 없어서 아빠 점수가 '레드 카드'일 수도 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뛰는 아빠의 마음을 이해해줄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귀국한 지난 2일에도 오전 11시 공항에서 나와 같은 날 오후 7시30분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부천FC-충남아산전 VAR 심판을 봤다. 오후 11시30분에야 귀가했고, 이튿날 새벽 서초구청으로 출근했다. 정 심판은 "김민재 선수에게 감사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가 아니었다면 열심히 살아가는 나와 동료들의 모습을 알리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시작은 '김민재 닮은꼴'이었지만, 그라운드 안과 밖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달린 인간 정동식의 진정성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그래서 나처럼 힘든 환경에 놓인 사람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렸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선수가 아니어도 그라운드를 누비는 방법은 많다. 나는 심판을 택했다. 내가 공정한 판정을 내린다면, 언젠가는 이 세상도 공정해질 거라고 믿는다"면서 "나는 욕심이 많다. '유퀴즈'에 출연하고 싶고 강연도 하고 싶다. '어렵더라도 달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는 메시지가 모두에게 전해질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금태섭 “신당에 와서 한번…” 깜짝 영입에 천하람 답변은 ① | 중앙일보
- 새카맣게 탄 딸…"이 밥이 피가, 살이, 가죽이 되길 기도했다" | 중앙일보
- 또 검은 액체 콸콸…로마 명물 피우미 분수에 '먹물 테러' | 중앙일보
-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8명 숨진 미 총기난사 끔찍했던 현장 | 중앙일보
- 외국인도 인서울…유학생 16.7만명 '사상최대', 몰려간 대학은 | 중앙일보
- 카페서 흡연 말리자…"잘 치워봐" 커피 붓고 조롱한 중년 남성들 | 중앙일보
- 521명 몰려간 '소아과 탈출' 수업…의사들 간판 뗄 결심, 왜 | 중앙일보
- 포렌식 참관중 쿨쿨 잔 변호인…"2년전부터 유행한 신종 기술" | 중앙일보
- "총선 전, 검찰 작업 예상"…'돈 봉투' '60억 코인' 골치아픈 민주 | 중앙일보
- 영국 대관식 내내 3.6㎏ 보검 들었다…시선강탈 이 여성의 정체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