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금속에 뜨겁게 새긴 은실...입사장 모녀를 만나다 [가업 장인을 찾아서]
“어머니가 창가에서 햇빛을 받으며 정을 가지고 작업하시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늘 지켜봤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정을 잡아볼래?’하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렇게 입사를 배우게 됐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요.”
김선정(51) 입사장(入絲匠) 이수자는 처음 정질을 배운 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홍정실(76) 입사장 보유자의 딸이다. 쌍둥이 동생인 김문정씨도 입사장 이수자다. 지난달 13일 서울 강남구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에서 만난 김 이수자는 “세 모녀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운명 같은 일”이라며 “어머니는 스승이면서 제가 존경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고 했다.
입사는 금속 표면을 쪼아 홈을 만든 뒤 그 자리에 금실·은실을 채워 매화·난·대나무·학·사슴 등 무늬를 만드는 기술이다. 금속에 정질을 반복하면 그 표면이 까끌까끌한 그물망처럼 변한다. 입사장은 이 거스러미를 이용해 은실을 박는다. 거스러미 위에 은실을 놓고 망치로 치면 거친 표면 사이에 은실이 달라붙는 원리다.
면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실을 쓴다. 실을 하나하나 붙여 박으면서 면적을 넓혀 면을 만드는 식이다. 작은 필통 하나를 만드는 데도 바탕의 정질과 은실을 입히는 과정을 합해 3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각종 관절염과 시력 저하는 고질병이다. 홍 입사장은 “허리가 너무 아파서 작업 시간 외에는 온종일 서서 생활할 때도 있다. 그래도 그런 과정 없이 뭘 할 수가 있겠냐”며 웃었다.
홍 입사장은 조선 시대 마지막 경공장(京工匠, 왕실·관청 소속 장인)이자 초대 입사장 보유자인 고 이학응 선생을 사사했다. 대학에서 미술공예를 전공한 후 미술대학 교수가 된 홍정실은 전통문화 연구자인 고 예용해 선생의 저서 『인간문화재』를 읽고 입사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천만다행으로 은입사를 하는 분이 이 세상 어디에 살아 있다면, 세계에 자랑할 민속 공예를 되살릴 거룩한 존재가 될 것이다”는 문장이었다. 홍 입사장은 “거멍쇠(그을음을 입힌 검은 색깔 무쇠) 위에 은실박이 된 무늬를 보고 한눈에 운명처럼 반했다”며 “끊어진 맥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맥이 끊어진 입사 기법을 전수받기 위해 전국을 수소문하며 미술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을 만났다. 그렇게 7년 만에 이학응 옹을 찾았다. 78세였던 이 옹은 입사를 배우겠다며 제 발로 찾아온 30대 초반의 홍정실을 손녀처럼 아꼈다. 88세의 나이로 별세하기 직전까지 10년간 젊은 제자에게 전통 입사기법을 하나하나 전수했다. 홍 입사장은 “오랜 시간 유물이나 서적을 통해서만 배웠던 입사를 손으로 만져가며 배우기 시작했을 때의 그 희열을 잊을 수 없다”며 “마치 사진으로만 본 음식을 직접 맛봤을 때의 느낌 같았다”고 했다.
두 모녀는 스승과 제자이면서 한 길을 걷는 든든한 선후배다. 어머니는 입사 유물 연구를 위해 고미술품점을 갈 때마다 대학생이던 딸을 데리고 갔다. 방학 때는 함께 인도·중국·일본 등에서 현지의 전통 공예 기법을 익혔다. 모녀가 창작의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김 이수자는 “어머니는 여행하면서도 온종일 입사 얘기를 했다”며 “잊혀진 문화를 복원하겠다는 목표가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어머니를 팬으로서 응원하는 마음도 크다”고 했다.
김 이수자는 인문 계열의 학부를 졸업했지만 미술을 배우기 위해 다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입사를 배웠다. 홍 입사장은 “입사는 기술이 아닌 예술의 영역”이라며 “재료와 무늬에 대한 연구, 전통적인 기법으로 현대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 모두 창작 활동의 일부”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홍 입사장의 작품 중에는 젊고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것들이 많다. 그는 아직도 고미술전에 가서 공예 장식 기법을 연구하고 유물을 모은다.
“과거의 공예를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끝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유물은 한 시대의 지혜가 집약된 결과물이니 거기에서 힌트를 얻는 거죠.”(홍정실 입사장 보유자)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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