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없던 7차전... KBL에 남은 각양각색의 역사
[이준목 기자]
한국 프로농구(KBL) 챔피언 결정전에서 7차전 시리즈는 그동안 총 5번이 있었다. 2023년 안양 KGC와 서울 SK의 7차전은 역대 6번째이자 무려 14년만이다. 양팀 모두 물러설 곳없는 마지막 경기에서 우승과 준우승이 엇갈리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한국농구사에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KBL 역사에서 7차전 시리즈를 가장 많이 치른 팀은 바로 전주 KCC다. 통산 5회 우승을 차지한 KCC는 이중 전신인 대전 현대 시절이던 1997-98시즌(Vs. 부산 기아)부터, 2003-04시즌(Vs. 원주 TG), 2008-09시즌(Vs. 서울 삼성)까지 3번의 7차전 시리즈를 치러서 모두 '최후의 승자'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 공교롭게도 7차전 시리즈 순서대로 정규리그 1, 2, 3위로 각각 플레이오프에 올라서 모두 우승을 차지해봤다는 것도 오직 KCC만이 보유한 이색적인 기록이다.
프로농구 출범 2년 만에 최초의 7차전 시리즈가 벌어진 1997-98 챔프전은 지금도 KBL 플레이오프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다. 특히 허재의 부상 투혼을 앞세운 부산 기아(현 울산 현대모비스)의 선전은 승리한 우승팀보다 패배한 준우승팀이 더 주목받는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당시 정규리그 3위에 그쳤던 기아는 힘겹게 챔프전까지 올라왔으나, 에이스 허재의 부상, 노장이 된 주축 선수들의 체력고갈, 외국인 선수 저스틴 피닉스의 태업 등 온갖 악재를 안고 정상적인 전력이 아니었다. 이상민-추승균-조성원-조니 맥도웰 등 역대급 전력을 구축한 정규리그 1위팀 현대와의 격차는 커보였다.
하지만 기아는 허재가 7차전까지 평균 23점 4.3리바운드 6.4어시스트 3.6스틸, 3점슛 3.6개의 괴물같은 외국인 선수급 활약을 선보이며 현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당시 허재는 플레이오프 기간 중 오른쪽 손등 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고, 챔프전 동안에 상대 선수와 충돌에 눈까지 찢어지는 부상을 입고서도 이런 활약을 보여준 것이다. 기아는 첫 2경기를 연승했고, 5차전까지도 3승 2패로 앞서나가며 시리즈의 향방을 안개 속으로 몰고갔다.
하지만 체력이 한계에 달한 허재와 기아는 결국 마지막 고비를 넘지못하고 6, 7차전을 연패하며 결국 현대에 역전우승을 내줬다. 비록 기아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허재는 기자단 투표 37표 가운데 19표를 받아 MVP로 선정됐다. 준우승팀 소속 선수가 챔프전 MVP도 선정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그만큼 당시 허재의 활약이 이견이 없을만큼 강렬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허재의 활약에 다소 가려졌지만, 시리즈의 고비마다 폭발적인 3점슛으로 사실상 승부를 뒤집은 현대 조성원 역시 이후 '4쿼터의 사나이'로 두고두고 명성을 떨치게 된다.
두 번째 7차전 시리즈는 4년 뒤인 2001-02 시즌이었다. 대구 동양(현 고양 데이원점퍼스)은 불과 몇년전까지 프로농구 역사에 길이남을 32연패와 0할대 승률의 오명을 남긴 단골 꼴찌팀에서 1등으로 환골탈태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김승현이 이전 시즌 최하위였던 동양을 단숨에 통합우승으로 이끌며 신인왕과 정규리그 MVP를 동시에 휩쓸리며 KBL 역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신인으로 등극했다.
챔프전 상대였던 SK는 서장훈-조상현-황성인 등이 주축이 된 '초대 우승(1999-00시즌)' 멤버들이 함께한 마지막 시즌이었지만, 외국인 선수들(찰스 존스, 에릭 마틴)의 부진과 부상이 발목을 잡으며 역전 우승을 내줬다. 이후 서장훈이 FA로 이적하고 김선형-애런 헤인즈가 등장하는 2010년대가 오기까지 SK는 장기간의 암흑기에 빠지게 된다. 5차전까지 2승 3패로 뒤진 팀이 6,7차전을 잡고 역전우승을 거둔 것은 1998년의 대전 현대에 이어 동양이 지금까지 마지막이었다.
2006-07시즌 울산 현대모비스의 우승은 KBL 역사상 최고의 사제 콤비로 불리우는 '유재학-양동근 신화'의 출발점으로 회자된다. 현대모비스는 전신인 부산 기아 시절 원년 우승 이후 허재-강동희-김영만 등 '실업 기아자동차' 세대의 주축 멤버들이 하나둘씩 노화거나 은퇴하며 강팀의 위용을 잃은 상태였다.
유재학 감독은 당시만 해도 주목받던 젊은 감독이었지만 우승과는 아직 인연이 없는 상태였다. 유 감독은 2004년 모비스 사령탑으로 부임하며 유망주 양동근을 중심으로 과감한 리빌딩을 시도했고, 예상을 깨고 2005-06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첫 챔프전에서는 당시 정규리그 2위 서울 삼성에 0-4로 스윕당하는 굴욕을 겪었던 유재학 감독은, 절치부심한 2006-07시즌에서는 3위 부산 KTF(현 수원KT)을 챔프전에서 만나며 최초의 챔프전 '영남 더비'를 치르게 됐다. 또한 당시 KTF의 감독은 유 감독의 동갑내기 절친인 추일승 감독이었다.
모비스는 4차전까지 3승 1패로 앞서며 우승을 눈앞에 두는 듯 했으나 5,6차전을 내리 내주며 벼랑 끝에 몰렸다. 유 감독은 KTF 공격의 핵심인 포인트가드 신기성에게 양동근 대신 수비 스페셜리스트 이병석을 붙이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 적중했다. 양동근은 7차전에서 19점을 넣은 것을 비롯하여 챔프전 7경기에서 평균 19.1점 7.3어시스트 3.4리바운드 1.7스틸으로 지친 KTF의 수비를 흔들어놓었다. 양동근은 팀의 통합우승을 이끈 공로로 정규리그에 이어 챔프전 MVP까지 석권했다.
울산 현대모비스는 2007년 첫 우승을 기점으로 KBL 최초의 3연패(2013-2015) 포함, 유재학-양동근 시대에만 총 6회의 우승을 차지했다. 전신인 부산 기아 시절까지 포함하면 7회로 단연 KBL 역대 최다 우승을 기록하며 왕조 반열에 올랐다. 영광의 순간을 내내 함께한 유재학 감독과 양동근 콤비는 각각 감독과 선수로서 KBL 역사상 GOAT(역대 최고)의 위상을 굳혔다.
최근 가장 마지막 7차전 시리즈였던 2008-09시즌 전주 KCC와 서울 삼성의 대결은 최초로 '4강 직행팀이 아닌 팀들 간의 챔프전'이었다. KCC는 그해 정규리그 3위, 삼성은 4위에 그쳤으나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4강 직행팀인 울산 현대모비스와 원주 동부를 제치고 챔프전까지 올라왔다. 두 팀은 공교롭게도 2년전 슈퍼스타 이상민의 보상선수 지명으로 인한 삼성 이적을 둘러싸고 묘한 악연이 있는 관계였다.
KCC는 정규시즌 초반 부침을 겪다가 서장훈을 인천 전자랜드로 트레이드하고, 하승진과 이적생 강병현을 중심으로 팀을 재정비하며 후반기에 상승세를 탔다. 삼성은 당시 최강의 외국인 선수로 군림했던 테렌스 레더를 중심으로 이상민, 강혁, 이정석의 가드진을 앞세워 맞섰다.
KCC는 1차전을 먼저 내주고도 2, 3, 4차전을 내리 쓸어담으며 우승을 눈앞에 두는듯했다. 하지만 삼성이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늘어지며 5, 6차전을 가져와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KCC는 6강(전자랜드)-4강(동부)에서 모두 5차전까지 치른데 이어 챔프전마저 최종전까지 이르며 KBL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70경기(71경기)이상을 치른 팀이 됐다. 여기에 자칫하면 챔프전 사상 최초로 3승 1패 상황에서 업셋을 허용하는 팀이 되는 불명예 기록을 세울 수 있는 위기였다.
마지막 7차전에서 KCC는 초반 테렌스 레더와 이규섭에게 대량 실점을 허용하며 고전했으나, 2쿼터 국내 선수들의 분전으로 흐름을 가져왔다. 강병현은 2쿼터 종료 부저와 함께 3점 버저비터를 작렬하며 전반을 끝내 역전시킨채 마무리했다. 3쿼터에는 최고참 추승균(24점)이 11점을 몰아넣는 노익장을 펼치며 점수차를 벌렸다.
결국 KCC는 레더만이 34점으로 고군분투한 삼성을 98-82로 여유있게 따돌리고 '챔프전 7차전 불패' 신화를 이어갔다. 정규리그 한때 8연패를 당하며 9위까지 추락했던 팀이 같은 시즌에 챔프전 정상까지 오르는 대반전은 KBL 역사상 전례가 없는 기록이었다. 사령탑이었던 허재 감독은 바로 11년전 챔프전에서 자신을 울렸던 팀의 지휘봉을 잡아 'KBL에서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한 최초의 농구인'이라는 진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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