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이 합법이었던 조선시대... 임금도 두려워했다
[김종성 기자]
조선시대 재판에 관한 사극에서는 고문이 자주 등장한다. 한밤중에 관청 마당을 횃불로 환히 밝힌 상태에서, 형리들이 피고인의 가슴을 불로 지지는 끔찍한 장면도 곧잘 묘사된다.
▲ MBC 드라마 <조선 변호사>의 한 장면. |
ⓒ MBC |
남영동 대공분실과의 차이
의자에 앉은 강한수의 뒤쪽에 서서 형리는 사정 없이 매질을 가했다. 태배(笞背)라는 명칭의 고문을 가했던 것이다. 가슴이나 복부를 때리는 것보다 덜 잔혹하게 비춰지기는 하지만, 이 역시 위험했다. 등은 오장육부와 연결되기 때문에 잘못 때리면 인명살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매질을 당한 주인공 강한수의 등에는 핏물이 흥건했다.
끔찍한 느낌을 주는 것은 우리 시대와 다르지 않지만, 사극 속의 고문 장면이 지금과 다른 게 있다면 그나마 공개된 장소에서 벌어진다는 점이다.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실처럼 비좁은 장소가 아니라 넓직한 관청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는 점이 우리 시대와 다르다.
고문 현장에 다수의 사람들이 서 있는 장면은 텔레비전 사극뿐 아니라 조선시대 형벌 그림을 담은 <형정도첩>을 남긴 화가 김윤보(1865~1938)의 작품에도 나타난다. 그가 그린 '금부난장(禁府亂杖)'은 말 그대로 의금부에서 죄인을 마구 때리는 장면을 담은 작품이다.
이 그림에는 총 14명의 관헌이 등장한다. 대청마루 위에는 감투를 쓴 관리가 앉아 있고, 상급 아전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 아래서 무릎을 꿇고 있다.
12명은 의금부 마당에서 죄인을 빙 둘러싸고 있다. 한 사람은 죄인의 양 어깨를 잡고 있고, 나머지 하급 아전들은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매를 높이 쳐들고 죄인을 포위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여러 사람이 마구 때리는 난장이 연출되기 직전 상황이 그림에 담겨 있다.
형벌제도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에는 고문이 합법적으로 용인됐다. 이 시대에는 장형(곤장형) 이상에 해당하는 범죄 혐의자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는 일이 법적으로 허용됐다.
<경국대전> 형전은 "장형 이상은 구금"한다며 구속수사 원칙을 표방한 뒤, "사형죄수에게는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우고 족쇄를 채우며, 유배형 이하에는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우며, 장형에는 칼을 씌운다"라고 규정했다. 구속되는 순간부터 이런 종류의 신체적 압박이 시작됐다.
이것 말고 매질 같은 고문을 할 때는 상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지방의 경우에는 관찰사에게 보고한 뒤 고문해야 했다. 한양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고문을 할 때는 지(旨)를 받아 시행한다"라고 <경국대전>은 규정했다. 임금의 지시를 먼저 받도록 했던 것이다. 단, 일반 백성이나 절도범에 대해서는 이 규정을 적용하지 않았다.
고문의 폐해
그렇게 고문을 합법화하면서도, 조선왕조는 그 폐해를 두려워했다. 대부분의 형사재판이 자백에 의존하다 보니 이를 받아낼 목적으로 잔혹한 고문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왕조는 이로 인한 대중의 원성 때문에 나라의 기초가 흔들리지 않을까 염려했다.
정조 임금도 그런 걱정을 품었다. 음력으로 정조 2년 1월 12일자(양력 1778년 2월 8일자) <정조실록>에 그가 전년도인 1777년에 내린 하교가 인용돼 있다.
하교에서 정조는 송나라를 세운 송태조 조광윤(재위 960~976)을 중주(中主)로 평가했다. 중간 등급의 건국시조로 평했던 것이다. 정조는 중주에 불과한 조광윤이 건국한 나라인데도 송나라가 번영한 이유를 형사제도에서 찾았다.
정조는 조광윤이 구금된 죄수들의 안전과 건강에 신경을 쓰고 가난한 죄인에게 음식을 주고 병든 죄인에게 약품을 지급한 일 등에 주목했다. 그는 송나라 왕업이 오래 유지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평했다. 조심스러운 형벌권 행사 때문에 민심을 잃지 않았다고 봤던 것이다.
형벌권을 잘못 행사하면 나라의 기초가 위태해진다는 정조의 생각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증명됐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은 일은 그해 초여름의 6월항쟁을 폭발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중도층은 물론이고 보수진영까지 박종철의 죽음에 분노했고 이는 전두환 체제의 붕괴를 부르는 촉매제가 됐다.
전두환이 집권한 기간은 흔히 제5공화국으로 불린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 제정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썼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대한민국에 포함되지만, 대통령 권한을 비롯한 정치체제의 핵심 요소들이 그 이전과 크게 달라 사실상 새로운 공화국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렸다.
전두환이 무너지면서 제5공화국은 종결됐다. 박종철의 죽음은 전두환 공화국의 몰락을 초래했다. 형벌권이 나라의 기초와 연결된다는 정조의 글이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조는 위 하교를 내린 이듬해인 1778년에는 <흠휼전칙>을 간행했다. 형벌 도구의 규격 등을 정한 이 책에서 그는 역대 군주들이 이 문제에 신경을 쓴 것은 "죄인을 신중히 다루려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평했다. 그런 뒤, 형벌권을 행사할 때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는 인식을 표시했다.
<경국대전> 형전은 고문을 포함한 형벌권을 남용한 관리를 장형 100대와 도형(徒刑, 징역형) 3년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형벌을 가하다가 사람을 죽이면 장형 100대와 영불서용(永不敍用)에 처한다고 예고했다. 고문치사를 범하면 공직 취임이 영원히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정조를 포함한 역대 군주들이 고문치사 같은 불상사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런 규정이 나오게 됐던 것이다.
고문의 폐해에 대한 염려는 세종시대에도 상당했다. 세종 21년 10월 17일자(1439년 11월 23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조정은 그해 초에 고문 방식에 관한 그림을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다. 불법 고문을 엄금하고자 그렇게 했지만, 기존의 폐해는 쉽사리 근절되지 않았다. 개중에는 그림을 잘못 해석해 법을 위반하는 관헌들도 있었다.
그래서 의정부는 새로운 대응책을 강구했다. 고문에 관한 지침을 좀더 구체적으로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세종에게 건의했다. 이를테면, 다리에 매질을 가할 때 사람을 옆으로 눕힌 상태에서 무릎 밑의 옆면을 때리라는 등의 지시를 구체적으로 내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세종은 재가했다.
위와 같이 중앙 조정과 임금은 불법 고문을 막고자 갖가지 대책을 강구했지만, 그로 인한 인명피해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고문 자체가 합법인 데다가 자백에 의존하는 수사 관행으로 인해 그 피해는 계속 양산됐다.
박병호 전 서울대 법대 교수의 <한국법제사>에 따르면, 일선 관헌들이 저지른 고문은 사극에 나오는 것 이상으로 잔혹했다. 돌덩이로 입이나 뺨을 치는 고문도 있었다. 죄인의 목에 씌운 나무칼을 나무에 매단 뒤, 죄수의 발에 돌을 매다는 고문도 있었다. 또 곤장으로 볼기를 때리는 게 아니라, 곤장 끝부분을 문질러 볼기 가죽을 벗겨내는 방식도 있었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별의별 잔인한 방식이 다 동원됐던 것이다.
중앙의 임금들은 저러다가 왕업의 기초가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실적에 눈이 먼 일부 관헌들은 죄수의 육신을 괴롭혀 입을 여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왕조의 단속은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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