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드 하우스를 가진 삶 #아웃오브서울
세 개의 집을 오가며 살고 있다. 1주일에 4일은 서울에서 근무하고, 공주에서는 마을호텔 오피스에서 일하고 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서울 갈월동 언덕 위의 다세대주택 꼭대기 층에서 산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공주 터미널 부근의 아파트가 내 집이다. 공주의 아파트는 혼자 쓰기에 넓은 공간이라 친구와 회사 동료들이 자주 오갈 수 있도록 늘 문을 반쯤 열어두는 곳이다. 지난가을부터 집이 하나 더 생겼다. 적어도 한 달에 하루는 공주 산골마을의 시골집에서 보낸다. 내 ‘서드(Third) 하우스’인 셈이다.
서울에서 살던 내가 다른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공주시의 한 공영차고지 설계를 맡으면서부터다.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마주한 풍경은 새로운 방식의 삶을 상상하게 했다. 서울에서는 부동산을 소유하거나 임대할 땐 커다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지만, 지방에서는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공간이 말도 안 되는 금액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빈 땅에 새로운 가치를 주고 싶어졌고, 서울대 건축과 동문들과 함께 스타트업을 시작하게 됐다. ‘클리’는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는 집을 만들고,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 세컨드 하우스의 즐거움을 제안하는 작은 회사다. 나의 세 번째 집, 공주 산골마을의 시골집은 다섯 가족이 공동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최소한의 규칙을 바탕으로 이 집에서 따로 또 같이 살아간다. 사용 예약은 온라인을 통해 할 수 있다. 집에 도착하면 개인 수납장으로 간다. 소지품을 꺼내놓고, 시골집에서의 하루를 충분히 보낸다. 떠나기 전엔 사용했던 물건을 말끔히 정리한 후 쓰레기는 마을 수거장에 내놓는다. 퇴실 버튼을 누르고 문밖으로 나서면 로봇청소기가 자동으로 청소를 시작한다. 한 달에 한 번은 운영사인 ‘클리’에서 대청소와 외부 정리를 해줘 늘 정돈된 느낌이다. 다양한 가족들과 함께 또 따로 사는 일은 상상하지 못했던 기쁨을 안겨줬다. 지난 김장 시즌에는 동네 이웃에게 덜컥 배추 두 포기를 선물받아 뜻하지 않게 김치를 담갔다. 그렇게 만든 김치를 공동소유자들이 모두 맛볼 수 있도록 냉장고에 넣어뒀다. 한 달 후 오랜만에 도착한 집엔 김치를 맛있게 먹은 또 다른 공동소유자의 선물이 놓여 있었다. 좋은 원두부터 살림을 위한 도구까지. 혼자 살면 모르고 지나갈 따뜻함을 풍성하게 누리고 있다.
나의 8년간의 서울살이 역시 행복했다. 친구들과 경리단길 쪽 셰어 하우스에 모여 살았다. 각자의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거실과 부엌에선 모여서 놀고, 함께 먹으며 보낸 시간이 모두 소중했다. 그때부터였다. 여러 사람들과 나눠 앉을 큰 테이블에 대한 로망이 생긴 것이. 내 공주 산골집은 집에 대한 버킷리스트를 이루게 해준 곳이다. 공간 설계, 현장 감리, 시공을 총괄하면서 오랫동안 원했던 ‘처마 깊은 집’을 지었다. 나에게 처마란 자연을 실감하며 사는 삶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넉넉한 처마 밑에 덱을 두어 걸터앉을 툇마루를 만들고 테이블을 놓았다. 네모난 아파트에서 실내생활만 했던 것과는 달리 탁 트인 논과 산이 펼쳐내는 계절의 서사를 만끽할 수 있었다. 열일곱 가구가 모여 있는 작은 산골마을의 계절은 천천히 흐른다. 콩을 타작한 후 말리는 장면, 수확한 콩으로 메주를 쒀 처마 밑에 걸어둔 모습을 보며 ‘제철’의 의미를 비로소 실감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반드시 하는 일은 마당으로 나가 직접 심은 조경수를 살펴보는 것이다. 산천의 많은 야생 초목류는 계절마다 다른 색감과 모양새를 보여주는데, 새벽이슬이 맺힌 초목을 한 바퀴 돌며 구경하는 동안 다양한 새소리가 들려온다. 귀를 쫑긋 세우며 새소리를 구분하는 일은 일종의 명상 같은 시간이다. 아침이면 논두렁 옆 시골길을 마저 걷는다. 이상하게도 안개 낀 아침에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데, 뒷산 너머에서 해가 점점 차오르고 안개가 감쪽같이 걷히는 순간을 목격하면 마음이 보다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작물을 돌보는 동네 어르신에게 인사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의도치 않게 제철 채소를 한 아름 안게 된다. 처음엔 힘들게 느껴졌던 지난한 이동 시간마저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도심 한가운데의 작은 보금자리인 서울 집, 금강 변의 넓고 쾌적한 아파트, 마당과 하늘을 품은 시골집까지. 오늘도 나는 서울과 시골 사이의 여러 집을 오가며 살고 있다.
박우린건축을 전공했다. 지금은 공동 소유 세컨드 하우스를 만드는 ‘클리’와 로컬 공간 콘텐츠 기업 ‘마을호텔’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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