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7사단 철수 때 위기…박정희·존슨, 이명박·부시 최상 조합”
"소련의 수소폭탄은 파괴된 우리나라의 도시 위에 떨어지기보다도 오히려 먼저 미국의 대도시에 떨어질는지도 모를 일인 것입니다." "한국 전선은 우리가 승리하고자 원하는 싸움, 아시아를 위한 싸움, 세계를 위한 싸움, 자유를 위한 싸움의 일개 소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시아의 자유를 안정하게 하기 위한 여러분의 중대 결정이 지금 필요합니다."
1954년 7월 28일 당시 79세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은 미국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영어로 또박또박 연설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첫 미국 의회 연설이었다. 1953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었지만 당당하고 단호한 어조였고, 짧은 연설 중에 기립박수가 33차례나 터졌다.
"자유는 평화를 만들고 평화는 자유를 지켜줍니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함께 세계시민의 자유를 지키고 확장하는 ‘자유의 나침반’ 역할을 해나갈 것입니다." "한·미동맹은 자유·인권·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로 맺어진 가치 동맹입니다. 우리의 동맹은 정의롭습니다. 우리의 동맹은 평화의 동맹입니다. 우리의 동맹은 번영의 동맹입니다. 우리의 동맹은 미래를 향해 계속 전진할 것입니다."
지난 27일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 내용의 일부다. 역대 일곱 번째 한국 대통령의 연설이었다. 44분 동안 매끄러운 영어 연설 중 ‘자유’를 46회 언급했고, 기립박수 26차례를 포함해 56차례 박수를 받았다.
이 전 대통령이 6·25전쟁 직후 한·미동맹의 절박함을 국내외에 알렸다면, 윤 대통령은 글로벌과 우주로 진화하는 한·미동맹을 천명했다. 70년의 시차를 둔 연설의 공통분모는 자유였다. 70주년을 맞은 한·미 동맹의 유래와 우여곡절을 되돌아보기 위해 『한미동맹 70년 한미 역사 140년』의 저자인 김열수(70)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안보전략실장을 만났다. 국방대 안보문제연구소장을 역임했고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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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벼랑끝 전술, 동맹 성사
박정희, 월남 파병 실리 극대화
노무현, 반미 넘어 현안 해결해
윤 대통령, 글로벌로 동맹 진화
」
"NPT 탈퇴 권리 포기로는 볼 수 없어"
-이번 정상회담을 총평하면.
"지난 70년의 한·미동맹을 회고하고 향후 동맹 강화를 위한 발전 방안을 논의한 회담이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핵협의그룹(NCG) 창설에 합의하고, 북한이 핵으로 공격하면 즉각적·압도적·결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워싱턴 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국민을 안심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는 점은 큰 성과다."
-워싱턴 선언의 NPT 준수를 놓고 논란인데.
"워싱턴 선언에서 한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의무를 준수한다고 했을 뿐 탈퇴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NPT 10조에 규정된 '조약상의 문제에 관련되는 비상사태가 자국의 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음을 결정하는 경우에는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조항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지난 70년 한·미동맹은 어떤 기여를 했나.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이 제2의 6·25전쟁을 도발할 수 있는데, 한·미동맹이 전쟁 억제자 역할을 했다. 둘째, 미국은 1988년까지 무상 55억 달러를 비롯해 유·무상 군사 원조를 통해 한국군의 군사 전력 및 전략 발전에 기여했다. 덕분에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 6위권으로 도약했다. 셋째, 한·미동맹은 한국의 국방비를 절감하게 해줬고, 한국경제의 안정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조약 체결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반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가조인됐고,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 조인식을 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정전협정 체결을 맞교환했지만, 비준서는 1년이 훨씬 지난 1954년 11월 17일에야 교환했다. 한·미합의의사록 타결을 놓고 1년간 치열한 밀당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한국의 북진 통일을 염려한 미국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유엔사가 한국군 작전을 통제하는 내용을 담은 합의의사록을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일에 맞춰 조인했다."
미국, 이승만 제거 계획 세워
-이 대통령은 '벼랑 끝 전술'을 발휘했다.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해 진주했던 미군이 1949년 6월에 철수하는 바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고 판단한 이 대통령은 미국이 아무런 안전보장조치 없이 정전협정만 체결하고 한국을 떠난다면 제2의 6·25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것이 벼랑 끝 전술로 나타났다. 첫째,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정전협정 체결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먼저 체결해야 하고 그 조약에 미국의 '즉각 개입 조항'을 넣자고 요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머뭇거리자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 한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정전협정 체결을 방해하겠다는 신호였다. 둘째, 이 대통령은 휴전이 되면 통일이 물 건너간다고 봤기 때문에 휴전회담에 한국군 대표를 보내는 것도 꺼렸고 휴전회담에 참석한 한국군 대표는 끝까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의 고집 덕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탄생했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동맹을 출범시켜 안보와 번영의 주춧돌을 마련한 이 대통령의 공로가 가장 크다."
-미국이 당초 조약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당시 한국의 전략적·경제적 위상을 낮게 본 미국은 미군이 일본만 방위하면 소련의 팽창을 봉쇄할 수 있다고 봤다. 약소국이던 한국과 동맹 조약을 체결하면 미국만 손해라는 인식이 있었고, 조기에 종전해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당시 미국 조야를 지배했다."
-미국은 '이승만 제거 계획'까지 세웠다는데.
"트루먼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미국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고 군사정권을 수립하려고 '에버레디 계획'(Plan Eveready)을 짰다. 그러나 미국의 특사(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가 한국에 파견돼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을 타결해서 에버레디 계획은 발동되지 않았다."
박정희, 동맹 흔들리자 핵 개발 추진
-지난 70년 한·미동맹의 최대 위기는.
"큰 위기가 두 번 있었다. 첫째, '닉슨 독트린'에 따라 1971년 2만명 규모의 미군 제7사단이 철수할 때였다. 1968년 북한의 1·21 청와대 습격 사건과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으로 한국의 안보 불안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군을 막을 수 없자 핵무기 개발을 위한 ‘무궁화 꽃’을 피우려 했다. 둘째는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이 발생하면서 자주파와 동맹파가 대립하던 시기였다. 반미 감정이 대규모 촛불시위로 표출되자 미국 국방부 장관은 '한국민이 원하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02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은 '반미면 좀 어떠냐'고 돌출 발언했으나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이라크 파병, 평택 미군 기지 결정, 한·미 FTA 협상 타결,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수용 등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한·미 현안을 해결했다."
-한·미동맹이 위력을 발휘한 사례는.
"철통 같은 안보태세로 북한의 재침을 막아온 것이 가장 좋은 사례다.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미국은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으로 전쟁을 염두에 둔 '데프콘 3'을 발령했다. 미국 항공모함이 발진 대기하고 전폭기가 한반도 주변에 전개된 상태에서 한국군 1공수여단 등이 투입돼 판문점 미루나무를 절단하고 북한군 초소를 파괴하자 북한군이 도망갔다. '폴 버니언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그 직후 북한이 요청한 비밀회담에서 김일성의 유감 표명 편지가 낭독됐다. 베트남전·걸프전·이라크전·아프간전 등 미국 주도 전쟁에 한국군이 참여하면서 한·미동맹의 위력은 외부로 확대되고 있다."
-한·미동맹을 가장 잘 활용한 대통령은.
"동맹을 탄생시킨 이승만 대통령을 빼고 본다면 한국군 31만 2853명을 8년간 베트남전에 파병해 경제적·군사적 이득을 챙긴 박정희 대통령이다. 미국이 제공한 참전 수당과 차관을 한국 경제 번영의 쌈짓돈으로 활용했다. 군사원조 외에도 한국군은 미국산 장비를 확보하고 전투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
-역대 한·미 대통령 중에 가장 잘 맞았던 조합은.
"이승만·박정희·노태우·김영삼·김대중·이명박 전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국빈으로 초청됐다. 찰떡궁합처럼 '케미'가 잘 맞는 대통령을 초청했다고 본다. 현직인 윤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 조합을 제외하고 본다면, 베트남 파병으로 관계가 밀착됐던 박정희-린든 존슨, 진보정권 10년에 대한 반대급부로 친밀했던 이명박-조지 W 부시 조합을 꼽을 수 있겠다."
-한·미 동맹의 발전 방향은
"한반도 차원에서는 안보 동맹을 더 강화하고, 경제동맹과 기술동맹을 추구하며, 지역 및 지구적 차원에서는 가치동맹을 포함한 다양한 국제 이슈를 다루는 포괄적 글로벌 동맹을 지향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한·미동맹 발전을 위한 미래 궤도에 진입했다."
글=장세정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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