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살 '우리 애기'... "다음 생에도 엄마 딸로 태어나줘" [이태원참사_희생자]

이주연 2023. 5. 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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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6시 34분] "걱정할 거 없던 기특한 딸", 2년차 군무원 강가희씨

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압사당할 거 같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편집자말>

[이주연, 이희훈 기자]

 이태원참사 희생자 고 강가희씨 엄마 이숙자씨가 서울 시청에 있는 분향소에서 딸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 이희훈

"우리 애기 좀 볼게요."

지난 4월 30일,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5번 출구 앞. 엄마 이숙자(54)씨는 시청 광장에 발을 딛자마자 '내 아가', 강가희(24, 1998년생)씨를 찾았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 분향소, 맨 처음에 놓인 가희씨 사진 속 얼굴과 눈이 마주치자 후드득, 눈물이 맺힐 새도 없이 쏟아졌다. 딸의 영정 사진을 닦으며 하얀 국화를 사진 앞에 놓아 둔 엄마는 서너 걸음 떨어진 조예진씨 사진 앞에서 또 한 번 멈췄다. 새로 꽂을 받아들어 헌화한 후 또 서너 걸음 옮겼다. 이번엔 추인영씨 사진 앞, 엄마는 또 한참 시간을 보냈다.

강가희·조예진·추인영. 같은 대학 같은 해양스포츠 동아리에서 만나 '찐친'이 된 셋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을 찾았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관련 기사 : "압사 당할 뻔" 마지막 카톡...분명 살아있던 딸, 대체 왜 죽었나요 https://omn.kr/2371x )

"그래도 셋이 함께 있을 거라, 그거 하나는 다행이에요. '셋이서 꼭 붙어서, 좋은데 원 없이 놀러 다니고 하고 싶은 거 많이 해라...' 그 얘기 했어요."

10월 31일 오후 8시 45분, 가희가 떠났다

 이태원참사 희생자 고 강가희씨 엄마 이숙자씨ⓒ 이희훈

2022년 10월 29일 밤, 엄마는 유달리 하루 종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고 한다. 엄마는 가희씨와 통화에서 아픈 내색이 비칠까 '통화 한 번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고 했다. 하루에도 서너번씩 통화하던 가희씨도 어쩐 일인지 오늘은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까무러지듯 누운 다음 날 새벽 1시 50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었다.

서울 경찰서 관계자와 통화를 해보라고 했다. 가희가 지금 강북삼성병원 응급실에 있다고 했다. 엄마는 그 때까지만 해도 '엄마 이름, 집 주소 다 댄 걸 보니 조금 심하게 다쳤나보다' 라고만 생각했다. 가희씨 언니가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났대'라고 해도, 엄마는 '병원에 있으니 우리 가희는 살았다', 그 마음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한 시각 오전 5시 20분. 가희씨는 살아있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전날 병원에 실려 온 게 오후 11시 45분인데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도착했대요. 10분 동안 심폐소생술을 했더니 심장이 뛰더라는 거예요. 그 때부터 면회 할 때마다 고비라고..."

병원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가희씨에게 인사를 할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하라고 했다. 아이폰인 가희씨 휴대폰이 잠겨 친구들에게 연락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다들 알고 찾아왔다. 가희씨가 근무하던 군부대에서 오고, 함께 교육 받았던 군무원 동기들도 강원도·대구 전국 각지에서 찾아왔다. 학교 친구도 빠짐없이 왔다.

"병원 중환자실 앞으로 30명 가까이 왔어요. 다들 와서 '제발 가희 깨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줬어요. 제가 종교가 없는데 모든 신이란 신은 다 찾게 되더라고요. 제발 살려만 달라고 빌었어요. 숨은 쉬니까, 그냥 자고 있는 거 같았어요. 어찌나 예쁘던지."

엄마는 처음엔 "가지 말라"고 했다. "제발 엄마 손 놓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빌고 빌어도, 담당 의사 선생님이 전해주는 확률은 자꾸 숫자가 쪼그라 들었다. 31일 저녁 8시, 이제는 보내야만했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가희씨에게 말했다.

"가희야, 엄마 걱정하지 말고 편히 가. 좋은 곳으로 가. 엄마 딸로 살아줘서 고마워. 엄마가 많이 사랑해."

중환자실 밖에 있는 친구들과 영상 통화로 마지막 인사를 모두 나누고 나서야 '삐-------' 소리가 들렸다. 31일 오후 8시 45분, 가희가 떠났다.

4월 4일이 되도록, 엄마는 혼자 삭였다

 이태원참사 희생자 고 강가희씨 엄마 이숙자씨가 딸의 사진을 보여 주고 있다.ⓒ 이희훈

병원·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들은, 가희씨가 입버릇처럼 "엄마 가슴 아픈 일은 절대로 안 하겠다"고 말해왔다고 전해줬다. 가희씨는 실제 스물 네 해 내내 그런 딸이었다. 엄마는 가희씨에게 이제껏 용돈을 준 적이 없다고 했다. 이혼 뒤 홀로 두 딸을 키워내는 엄마의 힘겨움을 너무도 잘 아는 딸이었다.

"가희가 고등학교 때부터 편의점, 식당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제가 '일 다니지 마' 그래도 '아니야~' 이러면서... 친척 어르신들이 주신 돈으로 용돈을 쓰고는, 저한테는 '뭐 사달라, 뭐가 필요하다' 이런 소리 한 번을 안 했어요."

도리어 엄마 마음에 더 맺혀 있는 건, 마냥 밝았던 가희씨 모습이다. "엄마, 다들 나를 부잣집 딸로 봐. 내가 아르바이트 한다고 하면 친구가 믿지를 않아"라며 해맑게 웃었다는 가희씨. 일찍 철이 든 그는 대학교도 국립대로 갔다.

"대학에 장학금 받아서 입학했다고 방방 뛰면서 좋아했어요. 엄마에게 등록금 부담 지울 생각에 걱정을 했던가 봐요. 등록금이 싸니까 일부러 국립대를 택했던 거 같아요. 부모가 돼서 등록금 한 번을 못 해줬네요. (가희는) 새벽에도 서너 시까지 공부해가면서 4년 내내 성적 장학금 받아 가면서 다녔어요."

"걱정할 것 없는 딸"이었고, 어디 내놔도 남 부러울 거 없는 딸이었다. 졸업을 앞둔 딸은 9급 군무원(대한민국 국군에 소속된 특정직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더니 6개월만에 덜컥 합격했다. 2021년 통신군무서기보에 합격해서 이제 막 1년 근무를 채운 참이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취업까지 한 가희씨는, 묻지 않고도 살림을 채워 놓았다.

 군무원으로 근무할 당시 딸 강가희씨의 모습. ⓒ 이희훈

"PX(군 마트) 물건이 저렴하니까요. 금요일에 집에 오면 싱크대를 훑어봐요. 그리고는 우유, 식용유, 밀가루, 집에 필요한데 떨어져 가는 거 싹 사다가 꽉꽉 채워놨어요. 나중에 우리 가희랑 살고 싶다 할 정도로 다정하고 기특한... 제가 살면서 제일 잘 한 게 딸을 둘 낳은 거예요."

그렇게, 집 안에는 가희씨 흔적이 가득하다. 엄마는 이번 여름 선풍기를 어떻게 틀어야 할까 눈물부터 나온다고 했다. 사고 일주일 전, 여즉 선풍기를 닦지 못하고 둔 걸 본 가희씨가 일일이 닦아 말려두었다고 한다.

"10월 23일이죠. 가희가 '엄마 선풍기를 아직도 안 닦았네' 하더니, 제가 모임 갔다 온 사이 다 닦아서 물기까지 싹 말려서 조립 해놨더라고요. 엄마 조금이라도 쉬라고, 그 정도로 알아서 다 해주던 딸이에요. 올여름에 그 선풍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까요."

어디에나 있는 가희씨를 그리워 하며, 참사 5개월이 흐르도록 엄마는 오롯이 혼자 슬픔을 삭였다.

4월 18일, 엄마는 생애 처음 서울에 왔다

 이태원참사 희생자 고 강가희씨 엄마 이숙자씨ⓒ 이희훈

엄마는 이태원 참사 기사에 주르륵 달린 댓글들에 놀라 뉴스를 안 본지 오래됐다고 했다. 시청 분향소로 아이들이 옮겨간 것도,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을 위해 유가족들이 싸우고 있는 것도 몰랐다. "먹고 살기 바빠, 다들 이렇게 이겨내는가 보다" 할 도리 밖에 없었다.

"그냥 이게 다 내 잘못인가, 그런 생각은 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신 지 5년이 좀 넘었는데요. 가희 사고 나고 11월 중순에 처음으로 엄마를 모시고 아버지 산소에 갔어요. '내가 불효자라서 우리 가희가 그렇게 됐을 때 우리 아버지가 날 안 도와줬나' 자책하게 되더라고요. 엄마는 아버지 산소 가서 너무 좋아하며 웃으시는데 저는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우리 가희 간 건 생각도 못 하시고... 엄마한테 말씀을 못 드렸어요. '가희가 일 적응하느라 바쁘다', 그렇게만 말했죠."

한 달을 넋 놓고 있다가 겨우 출근을 했다. 하루도 일을 못 했는데 월급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기름집 방앗간에서 일한 지 5년 좀 넘었어요. 가희 그렇게 되고 한 달을 못 나갔는데 월급을 넣어주신 거예요. 일 안 해도 또 월급을 주실까봐, 미안한 마음에 그만둔다는 소리를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일으켜 세워주시더라고요..."

엄마는 혼자인 줄 알았지만, 혼자만은 아니었다. 가희씨의 절친, 예진·인영이 부모님도 "분향소에 가희 사진만 없어서 마음이 아파도, 엄마가 마음 내어주길"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엄마는 이태원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10.29 진실버스'가 지난 4월 4일 대전을 방문한 날에야 처음으로 예진이 엄마와 인영이 엄마를 만났다.

"셋이 워낙에 친했으니까 예진이도 인영이도 잘 알던 애들이었죠. 셋이 서울 간다고 해서 아무 걱정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고... 예진이 엄마도, 인영이 엄마도 그저 저를 기다려주셨다고 해요. 언젠가는 오겠지, 그러셨대요."

지난 4월 10일에는 가희씨 사진을 분향소에 올렸다. 대전에 살고 있는 엄마는 지난 4월 18일, 생애 처음으로 서울에도 와봤다. 예진이 엄마가 서울역에서 국회의사당역까지, 지하철 갈아타는 법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국회 앞에서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를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1인 시위를 했다. 손에 피켓을 쥐어 본 것도, 1인 시위를 해 본 것도, 기자회견에 참석한 것도 쉰 네 해를 살도록 처음이었다.

"먹고 살기 바빠 뭘 잘 모른다"는 엄마 였지만, 이것만큼은 알겠다고 했다.

"10월 29일 오후 6시 34분에 첫 신고가 들어와서 위험을 감지했으면, 긴급 문자라도 보냈어야죠. 코로나 때 그렇게 많이 알림 문자를 보내더니 그 날은 뭐 했나요. 그게 원통하다는 거예요. 애들이 빠져나오고 싶어도 사람에 밀려서 못 나온 거잖아요. 이건 완전히 국가가 잘못한 건데, 인정을 안 하죠. 시민들이 길거리 가다가 '아직까지 떼를 쓰냐, 뭘 더 바라냐'고 해요. 저희 바라는 거 없어요. 우리 애 살려줄 수 있나요? 우리 애 간 거, 저도 알아요. 제대로 진상규명해서 다시는 이런 일 일어나지 않게 해야죠.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날까봐 전 두려워요."

 이태원참사 희생자 고 강가희씨 엄마 이숙자씨가 서울 시청 분향소에 있는 딸의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돌아서고 있다.ⓒ 이희훈

4월 30일 오후 3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분향소 지킴이를 하기 위해 엄마는 두 번째로 서울에 올라왔다. "하루도 허투루 살지 않은 가희"를 생각해, 엄마는 매일 마음을 다잡는다고 했다.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낸다고 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편지를 적어올까 했는데, 눈물이 나서 한 글자도 못 적겠는 거예요. 글씨가 아예 안 보이더라고요. 가희한테 하고 싶은 말은 그냥... 정말 다음 생이 있다면 그 때도 가희가 제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용돈도 넉넉히 주고 더 더 잘해줄 텐데. 한 번만 더 내 딸로 태어나달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우리 가희가 어디 있더라도 전 꼭 찾을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엄마가 우리 가희 찾을게, 꼭 만나자' 그러고 싶어요. 가희야 정말 많이 사랑해, 많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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