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 '임정의 품안에서' 83회 연재

김삼웅 2023. 5. 6.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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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 77] 김자동이 어렵사리 붓을 든 이유는 분명하다

[김삼웅 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 박도
 
그는 2010년 1월 4일부터 <한겨레> 기획연재 〈길을 찾아서〉의 여섯 번째 집필자로 선정되었다. 현대사의 독특한 삶을 살아온 명사들이 쓰는 고정란이다. 4월 30일까지 모두 83회에 걸쳐 〈임정의 품안에서〉라는 부제를 달고 연재하였다.

연재가 끝난 후 <상하이 일기 - 임정의 품안에서>라는 제목으로 2012년 <도서출판 두꺼비>에서 그리고 수정 보완하여 2018년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 - 김자동 회고록>으로 <푸른역사>에서 재간하였다. 이 책의 '완성본'인 셈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말한다.

"나는 임시정부의 품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평생을 임시정부에 대한 기억을 품고 살았다. 임시정부는 내 삶의 뿌리였고, 살아가는 길의 좌표였다. 이 책은 내 안에 남은 임시정부의 기록이다."

<한겨레>는 연재에 앞서 "임정은 나의 고향… 항일역사 낱낱이 증언할터" 제하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 임시의정원 1942년 10월 제34차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다섯째가 김구 임시정부 주석, 둘째줄 오른쪽에서 넷째가 김자동 회장의 아버지 김의한이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임정은 나의 고향… 항일역사 낱낱이 증언할 터

"내 나이 팔순을 지나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세상을 헛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겨레>가 2008년 창간 20돌 기념 기획으로 연재를 시작한 원로들의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여섯째 화자인 김자동(82·사진) 선생은 뜻밖에도 연재를 시작하는 감회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동안 독자로서 '길을 찾아서'를 즐겨 읽었지만 막상 그 주인공이 되고 보니 의욕만큼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는 뜻이다. 

하지만 공식 직함인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회장'과 '임정의 품안에서'란 회고록 제목에서 짐작하듯, 그는 1919년 3.1혁명의 독립 열망을 안고 중국 상하이에서 창설된 '임정'과 삶의 궤적을 같이하며 근현대사의 주요 장면을 체험한 '마지막 산증인'이다. 새해는 일제 강점 100년이기도 해 그의 증언은 한층 의미가 깊다.

그는 28년 가을 임정 본부가 있던 상하이시 프랑스 조계 안의 한인촌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선포 10년 만에 임정 요인들의 집안에서 첫 후손 출생이었던 만큼 그는 제목 그대로 '백범 선생의 품에 안겨 놀며' 자랐다. 당시 이미 작고한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 선생은 대한제국 시절 김홍집 내각에서 '홍범 14조'를 직접 기초한 개화파 관료이자 3.1운동 직후 비밀결사 조선독립대동단을 조직한 총재로서 일제의 감시를 받자 일흔넷의 고령으로 상하이로 망명해 임정의 고문을 지냈다. 아버지 성엄 김의한은 임정의 실무요원이자 김구 선생의 비서로 일했고, 어머니 수당 정정화는 임정 요인들의 식사 뒷바라지에서부터 독립운동 자금 모금까지 헌신해 '임정의 잔 다르크'로까지 불리었다. 

조선 후기 세도가로 꼽힌 안동김씨 후손인 김 회장 집안의 독립운동 헌신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으로 칭송받아왔다.(<한겨레>  2009년 8월 14일치 참조)
 
 동농 김가진과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 손자 김자동(88)은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46년 5월 부모와 함께 피란민 귀국선을 타고 서울로 환국할 때까지 그는 임정 청사를 따라 상하이~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 등지를 떠돌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남의 나라에서 나라 없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타향살이가 고달프지 않을 리 없었지만 국내에서 겪어야 했을 일제의 식민압제에 비하면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덜 위축된 소년기를 보냈던 셈이 아닐까. 물론 결코 편한 시간도 아니었지만."

또래의 식민세대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본말'을 할 줄 모를 정도로 '특이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동안 줄곧 기록으로 남길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때마다 손사래를 쳤던 그가 이제 어렵사리 붓을 든 이유는 분명하다.

"국사 과목마저 없어질 지경으로 역사교육이 날로 소홀해지고 심지어 왜곡되고 있어 임정을 비롯한 선열들의 항일투쟁사와 민족의식을 보고 들은 대로나마 남겨둘 의무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이명박 정부가 2008년 5월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킴으로써 "3.1혁명과 임정의 법통을 부인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30년이나 지워버리는 우를 범했다"고 개탄했다.

김 회장은 <한겨레>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한겨레신문사 초대 사장과 회장을 지낸 청암 송건호 선생과는 6.25전쟁 직후 서울대 동창이자 54년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로 함께 일한 '30년 지기'였다. 88년 창간 주주로 참여해 한때 <한겨레> 지국을 맡아 운영하기도 했다.  61년 창간 3개월 만에 박정희 쿠데타 군부에 의해 폐간당한 진보적 일간지 <민족일보> 기자로 일했던 그는 조용수 사장 처형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사업을 하던 그는 2004년 9월 임정기념사업회를 창립했다. 1990년대 초 오스트레일리아계 웨스트팩은행 노조위원장으로 200일 넘는 파업을 이끌었던 둘째딸 김선현(50·오토 대표) 씨가 사업체를 이어받아 기념사업회 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그는 "을사늑약 100돌의 해에 뒤늦게나마 '본연의 업'에 매진할 수 있어 다행스럽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주석 3)

 
주석 
3> <한겨레>, 2009년 1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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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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