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어도 너무 붉네... 한이 다 씻기면 하얀 철쭉만 필 것이여
[김재근 기자]
▲ 백아산 위령제 철쭉제와 6.25희생자 위령제. 26년째다. 제단을 멧돼지가 파 헤쳐 새로 단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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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전남 백아산에서 6.25 희생자 위령제가 열렸다.
전라남도 화순군은 무등산·백아산·모후산·화학산 등이 있는 산악 지역이다. 백아산은 전라남도 중심에 자리잡고, 화순군 동북부인 백아면에서 곡성군과 경계를 이룬다.
백아산은 해발 810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험준(險峻)하고 골짜기가 많다. 무등산과 지리산을 막힘없이 조망할 수도 있다. 과히 유격 활동을 펼치기에 천연의 요새라 할 수 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6.25 전쟁 이전부터 빨치산이 자리잡았고, 군경 토벌대와 격전이 끊이지 않았다.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가 정지아는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에서 따왔다고 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아리'도 그러하고. 곡성 당부(당 위원회나 그 사무실)도 이곳 백아산 동편 송단 3구 평지마을에 있었다.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백아산을 백운산, 지리산과 함께 3대 성지로 받든다.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본부와 빨치산 전남 총사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지역 빨치산은 1946년 10월 항쟁 이후 생긴 인민 유격대가 시초다. 처음엔 '작대기 부대'라고 불릴 정도로 무장을 갖추지는 못한 소수의 무리였다. 이후 여순사건과 극심한 좌익 탄압으로 입산하는 사람이 늘면서 점차 강력한 무장력을 갖추게 됐다.
화순 지역은 1946년 화순 탄광 노동자들로 조직된 좌익 세력이 막강한 곳이었다. 미군정 보고서가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한 지역'으로 기록할 정도로. 험준한 산악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더해져 치열한 격전의 무대, 비극의 땅이 됐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이 백아산으로 들어가면서, 3년여에 걸친 공비토벌작전이 펼쳐졌다. 본격적으로 작전을 전개한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밤에는 공비가 낮에는 토벌군이 쌍방에서 주민을 학살했다. 주민들이 비협조적이라는 이유였다. 이때 1000여 명 정도 희생됐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1951년 11월에서 1952년 2월 사이에는 미군 폭격기가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네이팜탄까지 투하하기도 했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은 계속됐으며, 종전 이후 2년이 지난 1955년 3월이 돼서야 끝났다.
▲ 위령제 뒤로 최대격전지 마당바위가 보인다. 조주호 집례가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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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항쟁에서 여순 사건을 거쳐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빨치산과 군경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간인까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990년대 들어 백아산 인근 주민들 사이에 이들을 추모하는 분위기 일었다. 1998년 백아면 청년회(당시는 북면 청년회)가 나섰다. 그렇게 올해로 26회째 위령제다. 처음엔 회원들끼리 거출해 지냈다. 십여 년쯤 지나면서 예산을 지원받았다.
정상 매봉과 최대 격전지였던 마당바위 사이는 철쭉 군락지다. 약수터도 있다. 그곳에 제단을 조성했다.
매년 5월 첫 번째 토요일에 열려왔는데, 올해는 큰비가 내릴 것이라 해 이틀 앞당겼다. 집례(사회)는 조주호가 맡았다. 백아산의 아름다움과 철쭉나무를 보존하고, 아직도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이산 저산에서 맴돌고 있을 고혼을 진혼하고, 오곡이 대풍을 이룰 수 있도록 기원하며, 면민의 안녕과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유교적인 절차를 따른 의식이지만 종교와는 무관한 행사라며, 이해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축관은 번영회 박흥환, 초헌관은 백아면장 조영균, 아헌관은 이장단장 조연호, 종헌관은 조영철이 맡았다. 아헌관은 번영회장이 맡아 왔지만 종교적인 사유로 이장단장이 대신한다고 했다.
비가 날리고 바람이 거세고 추웠다. 위령제가 열리는 곳까지 한 시간 넘는 가파른 길을 올랐다. 제를 지낼, 나누어 먹을 그 많은 음식을 청년회 회원이 나누어 짊어졌다. 북면 중학교 최광희 교장이 교사와 전교생과 더불어 역사의 현장을 찾아 도왔다. 정연지 화순군의원이 박현옥 시인과 아픔을 되새겼다. 외롭지 않은 위령제였다.
백아산은 흰 백(白)에 거위 아(鵝), '흰 거위 산'이다. 남도에서는 흔치 않은 석회암이다.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릴 때 흰 바위가 거위 날갯짓하는 것처럼 보여 그리 불렸다. 이름과 모양이 어울리는 산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능선을 따라 늘어선 하얀 바위 봉우리가 절경이다.
마당바위와 절터바위 사이에는 66m에 이르는 출렁다리가 놓였다. 이름을 '하늘다리'라 붙인 것은 당시 죽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라고 한다.
철쭉도 일품이다. 얽힌 이야기는 애달프다. 예전에는 핏빛이었다고 한다. 위령제 횟수가 거듭되면서 점차 붉은빛이 옅어져 가더니, 삼십여 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연분홍이 됐다고 한다. 간간이 흰 꽃도 보인다.
올 봄은 일찍 시작해서 꽃이 많이 졌다고 한다. 음복을 하며 덕담을 나눈다.
▲ 백아산 마당바위와 하늘다리 빨치산 감시초소였였던 마당바위는 최대격전지였다. 하늘다리가 놓였다. 무등산과 지리산이 훤히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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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면중학교 북면중학교 교장선생님이 교사와 학생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위령제를 돕고 넋을 위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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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백아산 하늘다리 구름과 비가 바람에 밀리면서 하늘다리가 비친다. ⓒ 김재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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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화순매일신문에도 실립니다. 네이버 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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