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 영혼 위로하고, 수조에 들어가고... 관객참여 공연 만드는 이진엽 연출

나원정 2023. 5. 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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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
무대 경계 부수고 관객과 여행
이진엽 연출 "장소성·커뮤니티·참여…
함께 움직이며 소통, 연대감 만들죠"
지난 23일 서울 마곡 LG아트센터에서 막을 내린 실험적 뮤지컬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 이진엽 연출이 공연장 로비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LG아트센터

공연장 입장이라기보단 출국 수속을 밟는 것 같았다. 최근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해 화제가 된 관객 참여형 뮤지컬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은 배우들과 함께 여행하는 듯한 공연이었다. 행선지는 이승과 저승 틈새, 영혼들이 떠도는 ‘차차차원의 틈’이다.
이 공연은 LG아트센터가 새롭게 선보인 ‘크리에이터스 박스’ 시리즈 1탄이다. 무대와 객석 구분 없는 가변형의 텅 빈 블랙박스 공연장 ‘U+스테이지’를 마음껏 활용할 참신한 창작자를 매해 상‧하반기 한명씩 선정해 공동제작‧기획 방식으로 소개하는 프로젝트다.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은 공연장 밖에서 실험적인 공연을 해온 극단 ‘코끼리들이 웃는다’의 이진엽 연출의 첫 뮤지컬 도전작이다. 지난달 15일부터 23일까지 회당 80석, 12회 공연 객석율이 90%를 웃돌만큼 관심이 뜨거웠다.


저승 문턱 '차차차원의 틈'에 빠진 관객들


지난 23일 서울 마곡 LG아트센터에서 막을 내린 실험적 뮤지컬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에서 로비에서 조를 나눈 관객들이 배우의 인솔에 따라 어두운 통로를 지나 주무대 공간으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관객은 아무도 제대로 듣지 않았던 주인공 영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다가온 그들을 껴안아주며 공연에 동참한다. 사진 LG아트센터

지난달 18일 오후, 공연장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맡기고 안내원이 시키는 대로 이름을 적었다. 공연장 앞 로비에서 서로 다른 네 가지 색의 쪽지를 들고 서성이는 관객들의 모습이 마치 터미널 대합실의 단체 여행객 같았다.
곧 이어 까마귀 옷을 입은 네 명의 배우가 노래하는 듯한 선율로 관객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해 네개 조로 나눴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들어선 거대한 공간이 바로 ‘차차차원의 틈’.
주인공은 아역 배우 시절부터 발 연기 논란에 시달리던 중 스턴트 대역 없이 액션 영화를 찍겠다며 나섰다가 사망한 배우 ‘소리’와 세상의 혐오에 맞서며 121살까지 장수한 게이 ‘성석’, 보트로 국경을 넘다 짧은 생을 마감한 난민 ‘가다’, 그리고 레즈비언 엄마들 슬하에서 자라다 화성 탐사선의 마지막 생존자로 죽어간 우주인 ‘나라’다.
네 주인공의 공통점은 자신의 장례식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 생전 기억을 잃은 네 영혼은 자신의 이야기를 찾으려 발버둥 친다.
관람 전 임의대로 나뉜 관객 조가 어느 영혼의 방에 배정됐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이야기를 중심으로 듣게 되는 구조다. 동서남북으로 쪼갠 무대에 들어설 때마다 이들의 이야기가 뮤지컬 넘버와 함께 마치 여행하듯 펼쳐졌다.

공연 관람이 영혼들 위로·조문하는 여정


벽 너머 들려오던 다른 영혼들의 이야기가 극 후반부 무대를 가르던 막이 제거되며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졌다. 각자의 아픔이 다르지만, 또 닮았다. 관객은 그런 영혼들과 같이 춤추고 노래한다. 마지막에는 이 모든 관람 여정이 영혼들을 위로하고 조문하는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생소한 관람 경험에 당황하는 관객도 있지만 기자가 참여한 18일 공연은 웃으며 즐기는 분위기였다. 다른 시간대 공연엔 극에 깊이 빠져 눈물을 흘리는 관객도 있다고 공연 관계자는 귀띔했다.
이진엽 연출이 해외에서 관객의 눈을 가리고 진행한 실험 공연 '몸의 윤리' 모습이다. 사진 박수환

2009년 극단 ‘코끼리들이 웃는다’를 창단한 이진엽 연출을 전화로 만났다. 서울 중구 입정동에 사는 주물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동네 축제처럼 공연한 ‘동네박물관 시리즈’, 사회적 생사의 갈림길에 선 소수자‧난민 등의 이야기를 해녀들의 물질에 빗댄 ‘물질’, 안대를 한 채 거리를 걷게 되는 ‘몸의 윤리’ 등 다양한 시도를 거듭해온 그다.
극단의 작업을 “장소 특정형, 커뮤니티, 관객 참여”의 3요소로 설명한 그는 “삶이 바빠 극장을 찾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들의 일상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공연을 해왔다”며 이번 공연은 “어느 때보다 관객 참여에 중점을 뒀다”고 했다.

공연이 관객 '골라' 한침대 눕고 욕실서 젖기도


관객의 조를 나눠 참여하게 하는 관람법은 전작에서 발전시켜온 것이다.
“저희 집에서 진행한 공연은 여섯 명 밖에 들어올 수가 없어서 처음으로 저희가 관객을 선택했죠. 낯선 관객 여섯명과 제 침대에 나란히 눕고 욕실에서 옷이 흠뻑 젖기도 했어요. 관객이 신체적 참여를 할수록 우리 안의 본능이 깨워지는 것 같아요. 함께 움직이는 몸짓으로 연대감, 소통이 이뤄지죠.”
이진엽 연출의 실험 공연 '물질'은 배우와 관객이 물이 가득 찬 수조 속으로 들어간다. 사진 장석현

그는 연극에서 동시대 이야기를 해왔다. 특히 소외 계층이 스스로의 터전을 가치 있고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작품을 주로 했다.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도 “청계천과 안산 다문화 거리 노동자, 다문화 가족, 난민, 독산동 중국 교포, 재봉 노동자 등과 작업해온 이야기가 녹아들었다”고 했다.
애도의 형식을 택한 건, 극본을 구상하던 시기에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면서다. 이 연출 자신이 할아버지 장례식을 치른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금액에 따라 선택하는 장례용품, 그리고 번호를 부여받고 '화장 중이다', '가루를 식히고 있다' 등의 이야기를 듣는 게 마치 패스트푸드점 같았다. 현대판 장례 문화의 부조리와 애도의 방식을 고민하며 지금의 이야기가 나왔다”고 그는 설명했다.

"관객도 공연 일부. 자신의 삶 껴안게 하고 싶죠"


이진엽 연출의 실험 공연 '물질'은 배우와 관객이 물이 가득 찬 수조 속으로 들어간다. 경복궁 앞에서 공연한 때의 모습이다 사진 장석현

7월에는 2016년 안산 난민 커뮤니티와 초연 후 재공연해 온 ‘물질2’를 세종문화회관에 다시 올린다. 물이 가득 찬 수조에 배우가 몸을 코밑까지 담그고 생사의 갈림길을 표현한 작품이다.
“해녀가 물질할 때 매일 죽으러 들어갔다 살아서 나온다는 인터뷰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그는 “난민들이 한국에 오며 품은 꿈까지 담으려 했다”고 말했다. 공연 말미 관객이 수조에 들어가기도 한단다.
“관객도 이야기의 일부죠. 자신의 삶을 무대 위에서 보고 스스로 껴안을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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