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벗어나니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주부 안식년, 1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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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화 기자]
안식년을 갖기로 하고 3개월째 접어들지만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식구들의 밥을 챙기고 있고, 대부분의 집안일도 거의 다 내가 하고 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느긋하게 아침잠을 잘 수 있다는 것 뿐이다. 가족들에게 내가 안식년을 보내고 있음을 잊지 않도록 틈틈이 상기시켜주고, 집안일에 매이지 않겠다는 마음을 다지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주부로서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도 안식년을 부르짖은 덕분에 내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으면 이제 말하지 않아도 남편은 수저를 놓고 김치를 꺼내며 상 차리는 걸 돕는다. 밥을 먹고 난 후에는 남편이 설거지를 한다. 처음엔 가시방석에 앉은 듯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이제는 거실에 앉아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쉬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고 일을 덜어주려는 남편의 배려가 고맙다.
▲ 아이들 때문에 지난 몇 년간 챙기지 못했던 어버이날, 안식년에도 며느리 역할은 계속 해야할 것 같다. |
ⓒ 심정화 |
하지만 안식년에도 안 할 수 없고, 남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일이 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자유로워지고 시간 여유가 생기면서 더 늘어난 일이 있다. 그건 바로 며느리로서의 역할이다. 아이들이 공부로 한참 바빴던 시기에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시부모님께 많이 신경을 쓰지 못했다.
시댁이 멀리 있어 한 번 다녀오려면 최소한 이틀은 시간을 내야 하기 때문에 지난 몇 년간은 자주 가지 못했다. 명절이나 어버이날 즈음에도 아이들의 학원 수업이 잡히면 가지 못하고 용돈을 보내드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가끔 서운한 마음을 내비치시는 시부모님께는 아이들 공부가 끝나고 나면 자주 찾아뵙겠다는 말로 양해를 구해왔다.
남편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걸 알면서도 혼자서 부모님께 다녀온 날이면 나를 대하는 눈빛과 표정이 차가웠다. 며느리에게는 괜찮다고 너그럽게 말씀해 주시면서도 아들에게는 서운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시니 남편도 혼자 부모님께 가는 길이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아이들 덕분에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늘 불편했다.
그리고 드디어 막내의 대입을 끝으로 아이들 공부가 모두 끝이 났고, 미루어왔던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다시 시작해야 될 때가 왔다. 5월달 달력을 펼치니 빨간 날들을 제치고 '8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올해 어버이날은 월요일이다. 시댁에 주말에 다녀올까? 어린이날부터 시작되는 연휴라 길이 많이 막힐텐데 남편에게 평일에 시간을 내라고 해야 하나? 선물은 뭘로 준비해야 할까? 밑반찬이라도 좀 만들어가야 하는데...
나는 그동안 쌓여온 마음의 짐을 빨리 떨쳐내고 싶어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분주한데 정작 남편은 어버이날에 대해 아직 아무 얘기가 없다. 언제 갈건지 물어도 대답이 시큰둥하다. 혹시 내가 안식년이라니까 같이 가자고 하기가 미안해서 그런가?
시댁이 있는 곳은 가구 수가 많지 않은 작은 시골 동네다. 동네 사람들끼리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고 있을 만큼 서로 가깝게 지낸다. 그래서 시댁에 가면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누구네 집 자식은 이번에 부모님께 뭘 해드렸다더라, 누구네 집 며느리는 시댁에 오면 어떻게 한다더라 하는 얘기들이었다.
두 분이 적적하게 지내시다가 오랜만에 자식들을 만나니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하시는 말씀이지 다른 뜻이 있으신 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가끔은 듣기가 불편했다. 세월이 쌓여 처음보다는 훨씬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시댁에 가는 건 조금 부담스럽다.
시부모님께서는 늘 자상하게 대해주시고 시댁에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지만 '며느리'라는 자체만으로 느껴지는 부담감이 있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이런 부담감을 속 시원히 털어놓고 이해받기 어렵다는 걸 살면서 내내 깨닫고 있다.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할 숙제이다.
어느새 나도 25년차 어버이
안식년이니 며느리 역할에서도 잠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어버이날이 지나고 마을회관에서 이웃들이 늘어놓는 자식 자랑에 속상해 하실 부모님이 떠올라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부모님의 목소리에 하루가 다르게 힘이 빠져 가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앞으로 몇 번이나 어버이날을 더 챙겨드릴 수 있을까 싶어 내 마음을 접는다.
무엇보다 나도 벌써 25년차 어버이이기에 요즘은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30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부모님을 생각하는 지금의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이 다음에 내 자식들의 마음도 헤아려 보게 된달까.
어버이로서도, 자식으로서도 늘 부담스러웠던 가정의 달 5월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하루종일 놀이동산을 힘들게 다니다가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던 어린이날의 기억도 되돌아보니 어느새 까마득히 먼 옛일이 되어버렸다.
풍선을 든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때가 그리워지는 걸 보면, 어버이날을 걱정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는 그리운 기억으로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서 벗어나고 나니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가족들의 자리가 생각보다 넓어 내 자리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나 자신보다 가족들을 위한 선택을 할 때 마음이 더 편하다. 내 안식년의 끝에는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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