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없이 판단할 것을 맹세합니까?

안정인 2023. 5. 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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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

[안정인 기자]

▲ 12인의 성난 사람들 포스터
ⓒ 극단 산수유
 
"피고의 유죄를 의심할 만한 근거가 있다면 여러분은 무죄 평결을 내려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피고에게 유죄 평결을 내려주십시오."

불이 켜지면 텅 빈 무대 위로 판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왼편 입구를 지나면 여러 개의 의자가 있고 오른쪽에 화장실이 붙어 있는 구조다.

잠시 후 정복을 입은 경비가 열두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무대 위로 나타난다. 젊은 여자부터 지팡이에 의지하는 나이 든 남자까지 성별도 연령도 다양하다. 몹시 더운 듯 부채질을 하거나 옷의 앞자락을 펄럭이는 사람들을 무대 안으로 밀어 넣은 후 경비는 문을 잠근다.

투덜거리며 무대 안으로 들어선 열두명은 재판의 배심원들이다. 이들은 3일에 걸친 재판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이제 열두 명의 배심원은 범인이 유죄인지 혹은 무죄인지 결정해야 한다. 단 어떤 결정이든 '만장일치'여야 한다. 결과를 낼 때까지 배심원들은 이곳을 나갈 수 없다.

재판은 살인 사건에 관한 것이다. 가난하고 위험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한 남자가 칼에 찔려 사망했다. 정황 증거, 목격자의 증언, 살해 도구 등은 피해자의 아들인 소년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배심원들이 유죄로 결정하면 소년은 사형당할 것이다.

"여기 열한 분이 '유죄'라고 손 들었잖습니까, 제가 손을 들면 걔를 사형장으로 보내야 되는데 저한테는 쉽지 않았습니다."

12명 중 한 남자가 이렇게 말한다. 이 남자는 피해자의 아들인 소년을 무죄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소년은 유죄일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혹시, 만의 하나. 미처 챙기지 못한 증거 때문에, 흘려들은 증언 때문에 무죄인 소년이 유죄로 판결 난다면 그는 죽는다. 무고한 사람이 법의 이름으로 살해되는 것이다.  그러니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남자는 말한다.  아니 뻔한 걸 꼭 그렇게 고집을 부려야 합니까? 누군가는 어이없어 한다.

날은 덥고 대화는 헛돈다. 당신 하나만 마음을 바꾸면 된단 말이야, 누군가는 화를 낸다. 어랍쇼,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흐른다. 누군가 남자의 편에 선 것이다.

"이 분은 혼자서 우리 생각에 반대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그 애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유죄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조롱을 받으면서 혼자 버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고 내가 나선 겁니다. 난 그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그 소년은 유죄일지 모르겠으나 좀 더 얘기를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진지하게 소년과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관객들은 배심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건과 재판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들의 대화 속에서 빈틈을 발견하거나 확증을 얻어야 한다. 중요한 단서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굳건해 보였던 증거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은 재판을 지켜본다기보다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물을 보는 느낌이 든다. 단 한 사람의 뛰어난 재능 때문이 아니다. 누군가의 질문과 의심이 모여 답을 향해 나아간다.

이 연극은 레지날드 로즈(Reginald Rose)가 1954년에 발표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80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낡거나 오래된 느낌은 전혀 없다. 이 작품의 질문이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편견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편견이 진실을 가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배심원의 이름이나 나이, 직업, 가정환경 등은 드러나지 않는다. 배심원이란 원래 그러려고 선택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배심원은 투표권이 있는 사람 중 무작위로 선정된다.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건'에만 집중한다. 얼핏 생각하면 완벽한 방법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 모두는 인간이다. 우리의 생각이란 살아온 배경이나 편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편견이란 색을 완전히 제거한 투명한 진실을 갖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나아가기 위해 다른 의견을 가진 쪽을 향해 말을 한다. 설득하고 화를 낸다. 이성을 잃고 떠들어대는 사이 그들이 어떤 환경을 거쳐 자라 왔는지 드러난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 생각이 사건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관객에게 짐작하게 만든다. 영리하고 탁월하다.
 
▲ 12인의 성난 사람들 인사
ⓒ 안정인
 
110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탄탄한 원작의 힘이다. 의상을 제외하고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구현할 방법은 행동이나 표정뿐이다. 배우들은 대사가 없는 중에도 끊임없이 인물이 되어 연기한다. 그런 인물들을 따라 관객도 바쁘게 눈을 돌려야 한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그런 의미로도 이 연극은 잘 만들어졌다.

무더위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인지 극장의 냉방 상태에 문제가 많다. 덕분에 배우들이 인사를 할 때쯤엔 극장을 뛰쳐나가 시원한 것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극장을 찾으려는 분들은 시원한 복장을 추천한다. 

"재판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들었을 거 같아요? 그런 재판을 받았다는 게 그런 애한텐 다행인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소년의 유죄를 주장하던 배심원은 이렇게 말한다. 1950년대도, 지금도 우리는 돈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돈이 없는 사람,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 법이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을까? 미래의 어느 시점, 지적이고 완벽한 인공지능이 재판을 맡게 되기 전까지 우리는 이 연극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잘 만들어진 연극이다. 이 연극은 6월 4일까지 미마지 아트센터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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