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일로 거점서 '태평양 폴란드' 됐다…미중 갈등, 체급 급상승 [지도를 보자]

이승호 2023. 5. 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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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뤄진 이 나라는 어디일까요?”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추가 정보를 드리자면,

■ 힌트

「 ①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1521년 세계 일주 도중 숨진 곳.
②세계 최초로 8체급을 석권한 복싱 전설 매니 파퀴아오의 조국.
③배우 최민식이 주연한 디즈니+ 드라마 ‘카지노’의 주요 무대.

‘카지노’ 최민식. 사진 디즈니+

아직 잘 모르시겠다고요.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주변 지도를 보니 감이 오셨죠? 태평양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관문, 필리핀입니다. 서쪽으론 인도차이나 반도, 북쪽으론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 때문에 필리핀은 오래전부터 강대국의 표적이 돼 왔습니다. 16세기 이후 400년 가까이 서양의 지배를 받았죠. 힌트에 나온 마젤란(1480~1521)이 필리핀에서 숨진 지 50년 뒤인 1571년,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듭니다. 필리핀이란 나라 이름도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서 따온 것입니다.

필리핀은 189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이번엔 미국이 이곳을 통치합니다. 한국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들어보셨나요. 1905년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와 윌리엄 태프트 미 육군 장관이 맺은 비밀 조약입니다. 이를 통해 미국과 일본은 각각 필리핀과 한국 지배를 서로 묵인합니다. 일본은 밀약을 맺은 뒤 100여일이 지나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5년 뒤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합니다. 이후 한국이 해방을 맞고 이듬해인 1946년 필리핀도 미국의 승인 하에 독립을 이루죠.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태평양의 폴란드”…몸값 상승 중인 필리핀


지난달 13일 필리핀 포트 막사이사이 기지에서 열린 미국과 필리핀의 합동군사훈련 발리카탄에서 필리핀 군 장병이 미국군 장병의 도움을 받아 총기를 조작해 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필리핀의 지리적 가치는 지금도 여전합니다. 오히려 몸값은 이전보다 더 오르고 있죠.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남아시아·동남아시아·남태평양 국가들과 협력해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겠다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전개 중입니다. 이 전략의 핵심축이 필리핀입니다. 대만·남중국해와 가까우며 중국 본토의 ‘턱밑’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죠.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은 필리핀을 ‘태평양의 폴란드’로 기대한다”고 분석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유럽 추가 침공을 막고 서방의 든든한 병참 기지가 된 폴란드처럼, 미·중 간에 무력대립이 발생하면 필리핀이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는 방어선이자 미국의 보급 기지가 되길 바란다는 거죠.

필리핀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습니다. 2016년 취임해 노골적인 친중 행보를 보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2022년 6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신임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상황이 반전됩니다. 필리핀은 지난 2월 자국 내 4곳을 군 기지로 추가 사용할 수 있게 미국에 제공했습니다. 대만과 근접한 필리핀 북부 세 곳, 필리핀과 중국이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남중국해 세컨드 토마스 사주(砂洲·둑 모양의 긴 모래톱) 인근 섬 한 곳입니다. 모두 중국이 ‘목구멍의 가시’처럼 느낄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미국이 중국에 총부리를 겨눌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뿐만아니라 미국은 지난 3월 11일부터 지난달 28일까지 열린 필리핀과의 정기 연합훈련 ‘발리카탄’ 땐 대만 최남단까지 거리가 200㎞밖에 되지 않는 필리핀 북단 바스코섬에서 훈련을 벌였습니다. 우크라이나전에서 활약한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 사격 연습 등을 진행했죠. 지난 1일엔 마르코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만나 양국 관계는 “철통 같다”고 천명했습니다.

미국과 필리핀은 1951년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동맹이지만, 식민지배 역사로 인해 사이가 좋지만은 않습니다. 1991년 필리핀 의회가 주권 침해를 이유로 미군 주둔을 거부하면서 이듬해 미군 대부분이 철수했었죠. 2014년 필리핀이 미국과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맺고 20여년 만에 미군 주둔을 다시 허용했지만, 곧바로 미국과의 군사훈련은 축소하고 중국산 무기를 사는 등의 두테르테식 ‘원미근중’(遠美近中) 정책이 이어졌습니다.


친중해봤자 별로…남중국해 불만 커진 필리핀


지난 2월 필리핀 해안경비대가 공개한 중국 해경 경비정의 모습. 지난해 8월 남중국해 세컨드 토마스 사주 인근에서 촬영한 것이다. AFP=연합뉴스
그랬던 필리핀이 왜 급격하게 미국 편으로 돌아섰을까요. 지난해까지 이어진 6년간의 친중 정책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중국과 계속되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2016년 네덜란드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PCA)는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법적 근거가 없고 중국이 필리핀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럼에도 중국은 여전히 ‘구단선’(九段線·1953년 마오쩌둥 주석이 남중국해 주변을 따라 자의적으로 획정한 ‘U’자 형태의 해상 경계선)’을 내세우며 남중국해 90%의 해역에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같은 해 취임한 두테르테 대통령이 친중 행보를 보이며 남중국해 갈등을 최대한 줄여보려 했지만, 중국 인민해방군과 해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군함과 어선을 지속적으로 위협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지난 2월 영유권 분쟁 중인 세컨드 토마스(필리핀명 아융인) 사주(砂洲) 인근 해역에서 중국 함정이 군수 물자 보급 작업을 하던 필리핀 해경 선박을 향해 레이저를 쐈습니다. 지난달 22일에도 같은 해역에서 중국 경비정 2척이 필리핀 함정 가까이 돌진해 양국 간 긴장이 커졌죠. 중국의 이런 행동에 대해 호주 싱크탱크 로위연구소는 “필리핀이 ‘중국은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라고 인식하게 한다”고 평가합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뉴욕타임스는 “이런 가운데 2021년 미국이 수백만정의 코로나19 백신을 필리핀에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필리핀 정부의 환심을 사기 시작했다”고 봤습니다. 필리핀 국내 여론도 중국에 등을 돌렸습니다. 필리핀 여론조사기관 펄스 아시아가 지난해 11월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 84%는 “미국과 협력해 남중국해 주권을 지켜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중국의 경제적 지원도 기대보다 신통치 않았습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2016년 취임 첫 해외 방문지로 중국을 선택했는데, 당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필리핀에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사업의 일환으로 240억 달러(약 31조원)의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양국은 지금까지 단 한건의 건설 프로젝트도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실체가 없는 매력적 경제적 약속을 대가로 전략적 양보를 얻어내는 중국의 함정에 빠졌다(홍콩 아시아타임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대만 전쟁 살아남으려면…미국과 관계 강화해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왼쪽)이 지난달 26일 필리핀 마닐라 북쪽 잠발레스주 레오비질도 간티오키 해군기지에서 열린 미군과 필리핀군 간 제38차 발리카탄 연합훈련을 시찰하며 미군의 고속기동포병로켓체계( HIMARSㆍ하이마스)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EPA=연합뉴스
대만 해협에서 중국이 연이어 긴장 수위를 높이는 것도 필리핀이 “다음은 우리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 미국과 밀착 행보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에서 “대만 문제에 필리핀이 말려들지 않는 시나리오를 상상하기 힘들기에 필리핀의 동맹인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역시 필리핀을 미국에 쉽게 내주지 않을 모양입니다.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장은 발리카탄 훈련이 진행 중이던 지난달 22일 필리핀을 방문해 “필리핀은 역사의 대세를 정확하게 파악하라. 중국의 주권·안전·영토 보전을 존중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에 중국이 필리핀에 경제 제재 카드를 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필리핀의 대중 주요 수출품인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거나 금지해 필리핀에 압박할 거란 겁니다.


식량·에너지난 발등의 불…미국이 해결해 줄까


마르코스 대통령도 어려운 필리핀 경제를 고려하면 중국의 경고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2위 쌀 수입국인 필리핀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지난해부터 식량난으로 서민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중국에 급하게 비료 15만t 수입을 요청할 정도였죠. 고질적인 전력난도 문제입니다. 아시아타임스는 “필리핀으로선 중국의 투자가 에너지난 해결에 절실하다”며 “필리핀은 화력 발전에 쓰일 천연가스를 남중국해에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중국과 진행하는 데 관심이 있다”고 전합니다.
지난달 22일 필리핀을 방문한 친강 중국 외교부장(왼쪽)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에 필리핀은 미국에 보다 확실한 안보·경제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미국의 동맹으로 움직이는 것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거죠.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필리핀을 어떻게 방어할 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반도체와 재생 에너지 등에서 과감한 투자를 미국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이 필리핀의 입맛을 충족해주지 못한다면? 향후 상황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미국 현지에서 “대만해협에서 전쟁이 나도 미국은 필리핀의 군사기지로 중국을 공격할 수 없다”며 “친강 외교부장에게도 분명히 밝혔다”고 말했습니다.

CNN은 “중국은 여전히 필리핀의 주요 무역 파트너로 에너지 및 농업 분야에서 투자 협상을 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필리핀 외교부도 지난달 “필리핀과 중국은 농업·인프라 개발·에너지· 과학기술 분야의 인적 연계를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죠.

한쪽에선 미국과 연합 훈련을 하면서도 다른 쪽으로는 중국과 경제 협력도 놓치지 않겠다는 모습을 보인 겁니다. 태평양 판도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미·중 사이에서 필리핀의 행보를 계속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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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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