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예전에 절도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어. 집행유예 기간이 안 끝났는데 또 절도로 기소가 됐어. 내 형량은 얼마나 나올까.”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는 5일 이런 질문에 “집행유예가 끝나지 않았는데 범죄를 저질러 집행유예가 취소되면 이전에 선고된 징역 1년 형을 살아야 한다. 새 범죄 형량도 추가로 부과된다”고 설명했다. 형법 제63조에 규정된 집행유예 효력 상실 경우를 기반으로 답변을 내놓은 것이다. 챗GPT는 “집행유예 기간 또 범죄를 저질렀다면 법원에서 엄격한 판단을 할 가능성이 크다. 변호사를 통해 적극 대처하고 피고인이 반성 의지를 보여줄 경우 최악의 형량은 피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회삿돈 40억원을 빼돌려 썼다가 적발됐을 시 어떤 죄로, 어느 정도의 처벌을 받게 될지도 물었다. 챗GPT는 “특정경제범죄 횡령죄로 기소될 가능성이 있다. 구체적 형량은 법원 판단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대규모 금액의 횡령인 경우 5년 이상 징역형이 예상된다”고 답했다. 현행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죄 양형 기준은 범죄 액수가 5억~50억원의 경우 징역 2~5년이다. 최근 서울중앙지법은 회사 법인카드로 명품 등을 결제하며 41억원을 횡령한 중소기업 경리에 대해 징역 7년을 선고한 바 있다. 양형 기준상 권고형의 상한보다 높은 형을 선고한다는 게 재판부 설명이었다. 횡령 관련 챗GPT 답변이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어이없는 실수도 있었다. 챗GPT는 횡령죄가 형법 347조에 규정돼 있다고 답했는데, 347조는 사기죄를 규정한 조항이다. 마약 형사사건 판결문 사례와 사건번호를 알려 달라는 요구엔 엉뚱한 민사사건 판결문 번호를 대거나, 대법관 이름을 피고인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챗GPT 바람 속에 법조계도 리걸테크(Legal-Tech·법률산업과 과학기술 합성어)와 생성형 AI의 결합에 주목하고 있다. 생성형 AI는 기존 데이터 등을 기반으로 새 결과물을 생성하는 모델이다. 기존 리걸테크는 의뢰인과 변호사 간 연결, 판결문 검색 등 플랫폼 서비스 제공에 집중됐다. 여기에 AI가 결합되면서 소송 결과와 형량 예측, 특정 사례에 대한 맞춤 판결문 제시 등의 분야가 발전할 길이 열렸다.
해외에선 이미 AI를 도입한 리걸테크 기업들이 법률문서 분석, 판결문 검색 및 소송 예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11년 설립된 캐나다의 ‘키라 시스템즈’는 각종 계약서의 불공정성 조항 여부 등을 분석해 시각화한다. 이를 사용한 한 미국 로펌의 경우 프로젝트 수행 인력당 근무량이 48% 감축됐다. 2013년 설립된 미국의 ‘케이스텍스트’ 서비스는 소장을 시스템에 올리면 개별 사건에 적용 가능한 관련 판결문을 추천해준다. 소송 데이터를 분석해 사건 유형별 소요 기간, 원고 승소 비율 등 소송 결과를 예측하는 ‘렉스 마키나’는 2010년부터 미국 로펌에서 활용되고 있다.
국내에선 중대형 로펌을 중심으로 법률 문서 조회·번역 등에 AI가 활용되고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에선 AI를 통해 계약서 등 법률 문서를 조회한다. 광장은 기업 인수·합병 계약서와 특허 문서 등을 전담 번역하는 AI 기술을 도입해 운영 중이다. 대륙아주의 경우 지난 3월 챗GPT가 법률산업에 미칠 영향을 주제로 초청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법조계에선 챗GPT의 법률 답변이 아직 일반인이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향후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한국인공지능법학회장인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챗GPT가 사례에 법률을 적용하는 수준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세밀한 접근에서 문제를 드러내는 것 같다”며 “판결문 등 법률 데이터가 많이 학습된 상위 버전 모델이 출시될 경우 더 정확한 분석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챗GPT는 확보된 데이터에 따라 나오는 정보 정확성이 달라질 수 있다”며 “아직은 전문가가 내용의 정확성을 확인해야 하는 단계”라고 했다.
챗GPT 모델을 기반으로 향후 일반인 대상 법률 상담 서비스가 등장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김병필 카이스트 기술경영학부 교수는 “데이터만 충분히 학습된다면 AI를 통한 판결 예측, 판사 성향 분석, 서면 쟁점 분석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 교수는 “자료를 정리 및 분석하는 ‘어쏘 변호사’(Associate Lawyer·저연차 소속 변호사) 역할은 상당 부분 AI가 맡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물론 AI 법률서비스의 한계도 분명하다. 우선 사람의 고유 영역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시각이 많다. 최 교수는 “AI의 생성물을 어느 정도 채택할지를 결정하는 건 결국 사람의 몫”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뇌물 사건에서 뇌물을 줬다는 사람과 받은 적 없다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 말이 맞는지 AI가 판단할 수 없다”며 “AI가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선 판결문 등 법률 데이터가 충분히 공개되지 않아 AI의 데이터 학습이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개인정보보호법 및 변호사법 등 기존 법률의 제도적 한계도 리걸테크 성장에 걸림돌이다. 리걸테크 업체가 일반 소비자에게 법률문서 자동작성 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변호사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챗GPT 같은 AI 활용 과정에서 고객 정보가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대한변호사협회 등 변호사단체와 리걸테크 기업 간 갈등도 계속되는 모습이다. 법률플랫폼 ‘로톡’은 2020년 11월 자체 확보한 판결문 47만건을 기반으로 형량예측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변협 지적에 약 10개월 만에 서비스를 접었다. 변협이 로톡의 변호사 매칭 서비스를 이용하는 변호사들을 징계하면서 로톡은 존폐 위기까지 몰린 상황이다.
리걸테크 발전을 위해서는 법적·제도적 분야에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조언도 나왔다. 강석구 한국형사정책법무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리걸테크 도입 및 대응을 위한 법무정책 연구’ 보고서에서 “국민 권익과 미래를 함께 고려한 장기 로드맵 수립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신지호 기자 p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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