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릴지언정 전진을 멈춘 적은 없다
브리온의 스프링 시즌은 고단했다. 시즌 동안 네 번 승리 인터뷰를 했고, 열네 번 패배 인터뷰를 했다. 10팀 중 8위로 시즌을 마쳤다. 지난 2일 서울 성동구 소재 브리온 사옥에서 ‘엄티’ 엄성현을 만났다. 그로부터 스프링 시즌의 어려움과 서머 시즌을 앞두고 설정한 새로운 목표 등을 들어봤다.
-스프링 시즌 종료 이후 1달여가 지났다. 어떻게 지냈나.
“시즌 준비를 빨리하기 위해 최근 팀원들과 함께 남이섬으로 워크샵을 다녀왔다. 브리온이 스프링 시즌 2라운드에 아쉬운 경기를 많이 보여드렸다. 내가 팀에 늦게 합류해서 다른 팀들보다 연습량이 부족했다. 팀원들 모두 서머 시즌은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무장한 상태다.”
-지난봄은 엄 선수에게 어떤 시즌으로 기억에 남았나.
“시작은 괜찮았는데, 갈수록 게임 패턴도 결과도 아쉬운 경기가 늘어나더라. 대진운이 좋아서 처음 기세를 탈 수 있었다. 그런데 리브 샌드박스전에서 어이없는 역전패를 당하면서부터 우리 팀의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KT 롤스터전도 이슈 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게임인데 졌다. 그때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스스로를 의심하게 됐다.
시즌 내내 팀적으로 제한되는 플레이가 많았다. 사실 이는 하위권 팀의 숙명과도 같다. 자꾸 지니까 손이 덜 가는 챔피언이 생긴다. 내가 해온 방식이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상위권 팀이 나와 다른 방식으로 게임을 하면 더욱 그렇다. ‘이 챔피언은 안 되는 것 같으니 다른 챔피언에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스스로 챔피언 폭을 제한하고,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된다. 서머 시즌엔 그 어떤 제한도 없이 경기를 치를 수 있게끔 노력 중이다.”
-브리온과 엄 선수는 스프링 시즌 메타를 어떻게 해석했나.
“여전히 드래곤이 중요해서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OP 챔피언들이 많아서 밴픽이 어려웠지만, 하위권 팀인 우리로선 오히려 기회였다. OP 챔피언이 많으면 강팀들도 대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제리, 루시안, 크산테, 아리, 아지르 등 때문에 양쪽 모두 정신없어하는 밴픽이 자주 나왔다.”
-밴픽이 고착화됐는데, 왜 게임이 단순해진 게 아니라 정신없어졌나.
“OP 챔피언은 상대하기가 까다로운데, 밴 카드가 모자라니까 몽땅 풀어버리는 경기가 자주 나왔다. 하나를 내주고 두 개를 가져가거나 했다가 서로 OP 챔피언을 제어하지 못하는 게임 양상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특히 시즌 말미엔 크산테가 답이 없는 수준으로 사기적인 성능을 발휘했다. 크산테는 탱커용 아이템을 사는데도 딜링 능력이 좋다. 밸런싱이 잘못된 챔피언이라 생각한다.”
-시즌 내내 바텀 중요도가 높아서 정글러를 낀 3대3 싸움처럼 느껴졌다.
“올 시즌엔 칼날부리 스타트 때문에 라인전 구도 이상으로 진영 선택이 중요했다. 블루 사이드가 이기는 경우의 수가 많았다. 블루 정글러가 칼날부리 스타트를 하면서 바텀으로 내려오면 레드 정글러가 어떤 동선을 짜도 10초가량 뒤처졌다. 바텀 선수들이 갱킹 압박 때문에 게임을 힘들어했다. 와드를 어떻게 박든 정글러들이 미친 듯이 갱킹을 갔다. 점멸을 써서 상대 체력만 소모시켜도 이득이라고 판단할 정도였다.”
-지난 스프링 시즌에 치른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는다면.
“리브 샌박전 2세트가 가장 기억에 남고 아쉽다. 장로 드래곤 전투 당시 우리에게 유리한 선택지가 정말 많았는데 소극적으로 플레이해서 역전패를 당했다. 시즌 초반에 첫 단추를 잘 끼웠던 만큼 상승 기류를 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드래곤 영혼도 획득한 상태에서 이길 수밖에 없는 경기를 져버렸다.”
-‘소극적’은 올봄 브리온의 패배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나온 단어다.
“나는 브리온이 소극적으로 플레이했던 게 아니라 ‘각을 보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이렇게 하면 나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상대를 죽일 수 있는지’를 생각하진 못했다. 상대도 나한테 압박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질 않았다. 우리만 압박을 받았다.
대치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상대 스킬을 빼줄 생각만 했다. 상대의 수를 읽는 능력은 좋다 보니 펀치 한 번에 K.O를 당하는 게임은 잘 안 나왔다. 대신에 잽만 온종일 맞다가 서서히 뻗어버렸다.”
-이런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에 ‘베릴’ 조건희 선수의 인터뷰를 봤는데 ‘한타 포지셔닝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하더라. 나도 일정 부분 동의한다. 보는 눈은 타고나는 것이다. 하지만 후천적인 영향도 없진 않다. 한타를 1000번 하면 1번은 같거나 비슷한 경우의 수가 나온다. 그러면 예전 경험을 살려서 더 나은 수를 둘 수가 있다.”
-브리온은 엄 선수의 오더 비중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브리온의 오더에 가장 많이 관여하는 건 맞지만, 우리 팀은 바텀 듀오와 탑라이너도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카리스’ 김홍조가 팀에 들어온지 얼마 안 돼서 융화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다. 스프링 시즌 막바지부터는 김홍조도 콜을 적극적으로 했고, 실제로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초반 15분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래는 인정하지 않았는데 매년 초반 15분 지표가 좋은 걸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나는 팀 게임만큼 솔로 랭크 리플레이도 자주 돌려보는 편이다. 솔로 랭크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초반 플레이 위주다 보니 그런 것 같다. 솔로 랭크 3판을 해야 1개의 중후반 판단을 배울 수 있다.
운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정글러들도 나처럼 (초반 플레이를) 할 수 있는데 팀에 맞춰주거나, 이런저런 플레이까지 생각하는 게 까다로워서 한타나 피지컬 싸움에 집중하는 것 같다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초반 15분간 남들보다 돋보이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디테일을 잘 캐치하는 편이다. ’지금쯤이면 상대 정글러가 여기에 있겠다’고 예측하거나, 상대 와드의 위치를 예상하거나, 챔피언 특성을 고려해서 갱킹을 가거나 한다. 가령 상대 바텀이 공격적으로 플레이할 수밖에 없는 조합을 짰다면 2레벨에도 바텀 갱킹을 간다. 머릿속에 번뜩이는 게 있으면 스크림 때 안 해봤던 동선을 실전에서 바로 쓰기도 한다.”
-신인 정글러 상대로 강해서 ‘뉴비 절단기’로도 불린다.
“내가 유독 신인 상대로 강한 건 아니다. 나보다 잘하는 정글러들이 많지 않나. 그들도 뉴비 절단기다. 경험의 차이가 절대적이어서 그렇다. 정글러는 양 쪽이 무난하게 동선을 돌면 난이도가 쉬운 포지션이다. 동선이 한 번 꼬였을 때도 잘하는 정글러가 정말 잘하는 정글러다. 정글러는 두뇌 싸움이 중요하다. 동선이 꼬였을 떄 플랜B나 C를 서로 예측해서 대응해야 하는데 이게 신인급 선수들로선 어렵다.
진짜 뉴비 절단기는 ‘피넛’ 한왕호 선수라고 생각한다. ‘피넛’ 선수 상대로 신인 정글러는 살아남기가 힘들다. ‘캐니언’ 김건부 선수는 동선 싸움보다 한타 상황에서 벽을 느끼게 되는 선수다. 정글러들은 처음 ‘캐니언’ 선수를 한타 상황에서 만나게 되면 느낌이 바로 온다. 암흑 시야 활용과 결단력이 정말 좋다.”
-엄 선수도 신인 시절 한왕호나 고동빈 감독에게 호되게 당했다고 했다.
“그땐 신인 정글러들이 살아남기 너무 힘든 시기였다. 2017~2018년은 1레벨부터 인베이드를 오가는 메타였다. ‘반갈(팀의 활동 반경을 맵의 위나 아래, 반으로 가르는 전략)’을 해서 상대 정글러를 기초적인 파밍조차 못 하게 하는 게임이 자주 나왔다.
배우지 않으면 도태되는 메타였다. ‘어떻게 하면 한 캠프라도 먹고 도망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카운터 정글링을 해서 상대 정글러를 말리게 만들 수 있을까’를 서로 고민해야 했다. 그때 쌓은 경험이 나에게 뉴비 절단기란 별명을 붙여준 것 같다.”
-요즘은 그 정도로 신인 선수에게 가혹한 메타가 아니라고 보나.
“그 정도는 아니다. 미친 듯이 카운터 정글링을 가는 메타도 아니고, ’초록 강타’로 상대 정글에 와드를 박을 수 있어서 서로 와드·렌즈 예측을 해야 하는 메타도 아니다. 전반적으로 게임의 난이도는 낮아졌다고 생각한다. 프로게이머로선 디테일한 부분이 사라져서 아쉽지만, 패치의 방향 자체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과거엔 정글러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았다.”
-T1전 패배 이후 인터뷰에서 “스스로가 안타까웠다”고 말해서 화제가 됐다. 상대 선수를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베테랑인 엄 선수가 여전히 성장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는 게 와닿았다. 당시에 왜 그런 말을 했나.
“T1전 당시 브리온이 하락세였다. 팀적으로 어떤 부분을 개선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 만나면 늘 자신 있었던 ‘오너’ 문현준 선수와 대결하게 됐다. 나는 강팀 상대로 웬만하면 자신 있어 한다.
그런데 그날은 경기 내용이 처참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오너’ 선수의 데뷔연도를 내가 알고 있다. 이후로 줄곧 붙어왔다. T1의 선수들이 전보다 성장했고, 실력이 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2년간 나는 얼마나 성장했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지니 말문이 막히더라. 그런 와중에 팀은 하락세기까지 해서 그런 인터뷰를 했던 것 같다.”
-문현준과의 맞대결을 자신 있어한 이유는.
“경험 차이도 있지만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서 그렇다. 내가 릴리아로 POG를 받고 이겼다. 나는 ‘오너’ 선수 뿐만 아니라 ‘피넛’ ‘캐니언’ 선수를 만나도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팀에 정신적 지주가 있어야 해서 그렇다.
평소엔 ‘모건’ 박루한이 해주겠지, ‘헤나’ 박증환이 해주겠지 기대하게 되지만 강팀 상대론 그런 게 안 통하지 않나. 그럼 나라도 ‘믿을 맨’이 돼야 한다. 자기세뇌의 효과가 조금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비슷한 체급의 상대를 만나면 조용해지고, 높은 체급의 상대를 만나면 자신감이 샘솟는다.”
-팀이 서머 시즌에 더 나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선 무엇을 개선해야 할까.
“완벽한 각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게 급선무다. 나는 브리온이 대승하는 한타만 설계하려 든다고 생각한다. 앞에 있는 1명만 잡아도 오브젝트 등 챙길 수 있는 이득이 많다. 그런 수를 캐치할 수 있는 자가 고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브리온은 너무나 완벽한 한타, 완벽한 이득만 보려고 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무조건 상대팀의 뒷라인을 물려고 든다. 앞라인에서 킬 교환만 나와도 이득인데 무조건 뒷라인을 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조금씩 상대방을 끌어들이다가 중요한 시야를 뺏겨버린다. 어떻게 보면 앞서 얘기했던 적극성과도 연관이 있는 문제다. 이건 훈련을 통해 고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하고, 이미 스프링 시즌 후반부부터 일정 부분 개선했다.”
-서머 시즌, 엄 선수만의 각오와 목표가 있다면.
“마지막 시즌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불태우겠다. 성적을 떠나서 스스로 만족할 만큼 노력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게임을 다루는 게 목표다. 팀원들 모두 발전하고자 하면 팀의 성적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고 생각한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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